▣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50- 가을 운동회 날의 그리움

영광도서 0 558

잃어버린 시간, 그야말로 잃어버린 시간이다. 카메라라도 있었다면 사진에 남고, 글로 기록할 생각을 했었다면 기록으로 남고, 그림을 그릴 생각을 했다면 그림으로 남아, 잊지 않았을 일들, 이것도 저것도 남지 않았다. 기억에 의존해야 그나마 추억으로 이미지를 떠올리거나 파노라마처럼 머릿속 잔상으로 기억할 뿐이다. 모든 것의 변화가 느렸던 때, 모든 것은 그대로 반복될 것이며, 매일이든 아니면 특정한 어느 시기면 모든 것이 그대로 재현될 일들이란 생각 때문이었든지, 그때 그 시절의 일들은 일기에는 기록되었을까 싶다만 일기장마저 버렸으니, 이렇게 잊고, 저렇게 버려서 잃어버린 시간들이다. 그럼에도 이제와 그때의 일들이 수채화처럼 소중하게 느껴진다.

 

지금은 초등학교, 그때는 국민학교 시절, 그 시절하면 여러 추억들이 있을 테지만 그중에 단연 가을운동회의 추억들, 누구든 한두 가지 추억이 있을 것이다. 개인적 추억은 아니어도 ‘그때는 그랬지’ 하는 생생한 영상이 마음속에 떠오를 것이다.

 

그때는 가을운동회는 온 동네의 축제였다. 그날만큼은 어른들도 일을 하지 않고 학교에 모였다. 우리 학교는 정문이 좌측에 있었다. 정문에 들어서면서 우측 가파른 계단으로 십여 미터 높이에 학교 건물이었고, 앞에는 운동장이 펼쳐졌다. 정문의 우측 끝부터 대략 사각형 모양의 운동장이었다.

 

이 정문 근처에 운동회 날이면 커다란 천막이 하나 쳐졌고, 학교건물 언덕 아래 중간쯤에 단상이 있는 옆에 본부석 천막이 쳐졌다. 본부석에선 선생님들이 운동회 진행을 하기 위해 분주했고, 설렘을 주는 상품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정문 옆 천막에선 마을 유지들, 반장이나 이장 등이 드나들면서 먹고 마실 음식들이 있었다. 나와 또는 우리 집과는 상관이 없는 천막이었다. 학교 건문이 언덕위에 있었던 덕에 그쯤에서 줄을 늘여 운동장을 둘러싼 벚나무들에 묶은 줄에는 만국기들이 달려 축제 분위기를 자아냈다.

 

가을이면 날씨가 쾌청한 날이 대부분이라 망친 날은 별로 기억에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동네 어른들이 모여들었고, 미리 짜놓은 청군과 백군으로 나뉜 아이들이 학년별로 줄을 선 가운데 교장선생님의 개회사와 함께 선생님들의 소개, 괘석리 이장과 광암리 이장(우리는 내촌면 광암리였고, 학교는 강 건너라 두천면 괘석리에 소재했다.) 내빈 소개 정도로 가을 운동회는 개최되곤 했다.

 

운동 종목은 개인 경기와 단체경기로 나뉘었다. 개인경기에선 주로 상품이 걸렸다. 육상은 거의 개인종목으로 100미터 달리기는 운동장이 좁은 관계로 한 바퀴를 돌아야 했다. 장애물 경기는 약식으로 학년별로 다르게 높이를 조정하는 장애를 넘고, 밀가루 속에 입으로 엿을 찾아 먹고, 한 바퀴 구르기를 하고 결승점에 들어가는 100미터 경기, 애향단별 릴레이 경기 정도였다. 여기서 3등까지 상품을 주었는데, 1등은 10원짜리 노트, 2등은 5원짜리 노트, 3등은 3원짜리 연필 한 자루가 상이었다. 노트에는 상이란 글자가 찍혔다.

 

주로 오전에는 개인종목이 펼쳐졌고, 점심시간이 한 시간 주어졌는데, 마을별로 모여 점심을 먹었다. 이 날 만큼은 어른들이 각기 별식을 싸 가지고 와서 어른들과 아이들이 함께 모여 접심을 먹었다. 오후가 되면 학부모와 함께 하는 종목과 단체종목이 주를 이루었고, 릴레이 달리기가 오후에 있었다.

 

학부모와 함께 하는 종목으로는 한 아이와 학부모 중 한 분과 발목을 함께 묶고 달리는 100미터 개인경기가 있었고, 청군백군으로 나뉜 박 터치기에 학부모들도 함께 했다. 이를 위해선 6학년 아이들과 선생님이 미리 종이 박을 만들었다. 종이 박을 장대에 매달아서 세우고 그것을 선생님들이나 아이들이 잡고 있었다. 그것을 터뜨리기 위해선 모래주머니를 아이들이 집에서 만들어왔다. 한 사람당 몇 개씩 만들어오게 하여 미리 준비해두었다 그날 사용했다. 종이 박 모양은 백색과 청색이었다. 경기가 시작되면 백군 아이들과 학부모들은 청색 종이 박을 향해 달렸고, 청군은 백색 종이 박을 깨뜨리려 달렸다. 양쪽으로 갈린 사람들은 일제히 나름대로 모래주머니를 높이 달린 종이 박을 향해 던졌다. 먼저 터치는 팀이 승리했는데 종이 박이 터지면 그 안에서는 종이 꽃가루가 쏟아져 나옴과 동시에 플랭카드가 펼쳐져 내렸다. 그야 말로 “대려잡자 공산당”이란 플랭카드였다.

 

단체경기는 군사놀이, 인디언 놀이, 덜블링, 파라미드 등이 있었다. 군사놀이는 상급학생들 중 남학생만 참여했는데 청백으로 나뉘었다. 각자 집에서 목총을 깎아왔다. 소위 간부들만 권총을 깎아서 사용했다. 소리도 냈다. 화약을 터칠 수 있도록 장치를 하여 각자 화약도 준비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놓으면 화약이 폭발음을 내며 터졌다. 화약 냄새는 참 좋았다. 실제 전쟁을 하듯 청백으로 나누어 한 측은 좌측, 다른 한 측은 우측 운동장에서 전진을 시작하여, 작전을 펼쳐서 운동장 한가운데서 목표물을 탈취하는 것으로 끝났다. 전쟁놀이 말미에는 화형식이 있었는데, 종이로 만든 김일성, 모택동, 호지명이 대상이었다.

 

4인 1조 경기로는 셋이 손으로 말을 만들고 그 위에 한 아이가 타고 청백으로 나뉘어 싸우는 경기가 있었다. 청군은 파란 모자를 썼고 백군은 하얀 모자를 쓰고 피아 구분을 하여 상대 말을 부수는 경기였다.

 

또한 인디언 놀이도 있었는데, 이것은 어른들을 즐겁게 했다. 윗몸을 벗은 아이들은 숯으로 인디언 분장을 했다. 그리곤 막대 하나씩 들고 운동장 한가운데에 모여 인디언 춤이라고 추었다. 인디언들이 그렇게 주문을 외우는지 몰라도 선생님이 가르쳐준 대로 “웃니웃니 꺄와웃니 야꺄야이끼 야꺄야무스 와!” 무슨 뜻인지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이런 노래로 어른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피라미드 경기는 청백으로 나뉘어 인간피라미드를 높이 쌓기였다. 무너지지 않게 밑에는 힘세고 큰아이들이 엎드렸고, 이층, 삼층으로 피라미드 모양으로 무너지지 않게 더 높이 쌓는 편이 승리하는 경기였다.

 

묘기로는 아래층에 아이들이 어깨를 둘러앉고 그 위층엔 그보다 수가 적은 아이들이 어깨를 딛고 앉고, 그런 식으로 삼층 정도의 탑 만들기도 있었다. 이렇게 앉아서 만든 다음 맨 밑에 힘센 아이들이 일어서고, 이어서 그 다음 아이들이 일어서고 마지막에 맨 위에 아이까지 일어서는 데 성공하는 묘기를 부렸다.

 

운동회의 대미는 애향단별 릴레이 경기였다. 이 릴레이 경기와 함께 운동회는 끝났다. 해도 뉘엿뉘엿 서산 너머로 질 즈음이었다. 청군과 백군의 점수 발표가 있었고, 승리한 팀은 별다른 상은 없이 우승기를 받았다.

 

그야 말로 그때 운동회는 어디나 대동소이했을 것이다. 지금과는 달리 군사놀이가 있고, 화형식이 있었다는 게 달라도 아주 달랐을 테지만, 그때는 그것들이 아주 실감이 났다. 실제로 화형을 시키듯 진지했고, 멋진 일이라 생각했다. 참으로 많은 사상의 시절이었다. 국기만 봐도 경례를 했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가던 길 멈추고 성스럽게 맞이하던 그 날들, 당연했던 일들, 그게 불편하다거나 싫지도 않았던 날들의 기억,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날들이어서 그런지 그립다. 특히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펼쳐지던 운동회, 종이 박이 터지면서 터져 나오는 동네 어른들이 일제히 지르는 환호성 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 점심시간에 어른들이 말아준 국수 맛이 입맛을 다시데 한다. 아! 옛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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