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53- 책임감이 강하면 패자다!
“인생이란 멀리서 바라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인생을 깊이 바라본 사람들은 인생을 기쁨으로 보지 않는다. 세상에 오는 것이 축하받을 일인 듯이 반긴다만, 세상엔 온 것이 아니라 태어난다고 하니 오고 싶어 온 것이 아니라 마지못해 온 듯한 말로 태어난다 하는 것은 아닐까싶다. 석가모니께서도 세상에 태어나는 고통이라 했으니, 엄마의 삶은 그러했던 것 같다. 온갖 업보를 안고 나신 듯이 매순간이 고해를 헤엄치는 삶과 같았던 듯싶다.
그랬다. 어떤 일이 벌어지면 방관하는 사람이 승자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 지는 것이다. 아버지는 방관이라면 방관이랄까, 무책임하다면 무책임, 아니면 무능력한 때문이든, 타고난 성격이든, 집안에 일이 생기면 그 일을 해결하는 몫은 오롯이 엄마의 책임이었다.
월급으로 생활하는 것도 아니고 농사를 지어 돈을 만들려면 늦가을이나 되어야 가능했던 때였다. 보통 농가라면 농사를 지은 옥수수나 콩 또는 팥을 팔아야 돈을 손에 잡을 수 있었다. 쌀은 판매 대상이 아니라 한 해 동안 먹을 것으로 빠듯한 게 보통이었다. 우리는 쌀은 자급자족할 수만큼도 짓지 못했다. 농사를 지어도 빚잔치하고 나면 오히려 모자랐다. 빚은 빚으로 불었고 대책이 없었다. 때문에 누나들은 열 살만 넘으면 서울로 식모살이를 보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넘어가는 생활이었다. 이런 형편 속에 늦가을이 아니면 돈이 생기는 때는 똥개가 강아지를 낳아 얼추 자라면 그것을 분양하거나, 정든 개를 오토바이를 타고 오는 개장수에게 팔거나, 채취해서 말린 약초를 팔거나 해야 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이렇게 어려운 시절에 한 사람을 유학시키려면 거의 불가능했다. 때문에 우리 동네에서는 대학은커녕 고등학교에 진학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우리 집, 큰형이 서울에서 학교를 다닌다 했다. 큰형이 집에 오는 날은 즐거운 적은 있을 리 없었다. 집에 오는 이유는 단순했으니까. 그 날은 반갑다기보다 부모님의 걱정의 한숨이 터지는 날이었다. 어떻게든 돈이 마련되어야 큰형은 서울로 돌아갔다.
그때 그 시절을 엄마는 맑은 정신으로 들려주셨다. “하루는 네 형이 돈이 필요하다고 왔는데, 안 해줄 수 있니. 지금 돈을 안 해주면 이제까지 공부한 게 다 소용없는 게 된다는데, 느 아버지는 한숨만 쉬지, 어디서 돈을 구할 수 있어야지. 그래 궁리궁리 끝에 군너미 허유사님댁밖에 갈 데가 없더라. 궁리 끝에 염치불구하고 새벽에 허유사님 집에 갔지. 집에 들어가니, 유사님은 일터로 나가시는 중이고, 양속장님이 부엌에서 아침밥 하느라고 불을 때시더구나. 아무말도 못하고 그냥 옆에 앉아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으려니, 양속장님이 ‘아무개 엄마 무슨 일이 있어 온 거지. 무슨 일인지 말해 봐요’ 하시는데 말은 안 나오고 눈물만 쏟아지잖니. 그래 한참 울고 나서 여차저차 이야기를 하니, 양속장님이 ‘다른 데 쓰려는 것도 아니고, 목사 되려고 신학 공부를 한다고 쓴다는데, 나중에 못 받으면 우리가 갚더라도, 내 돈은 없지만 교회 돈을 일단 쓰우.’ 하시면서 허유사님을 찾아서 사정을 말씀해주시니, 허유사님이 군말하지 않으시고는 돈을 내주시면서 위로해주시는데, 고맙다는 말도 안 나오고 눈물만 나와서 그걸 받아 집으로 와서 주어 보냈지 뭐니. 두고두고 그 분들께 얼마나 감사한지, 네 형이 그런 걸 아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그때 말씀을 하시면서 눈시울을 붉히곤 하셨다.
그때는 교회의 재정을 맡은 이를 유사라 불렀다. 속장이란 지금도 쓰는 단어지만 그때는 속회 또는 구역회를 맡은 사람을 그렇게 불렀다. 허유사님 가정은 원래 우리 동네에 있는 교회에 다니셨다. 그러다 바로 옆에 교회를 세우고 운영하고 계셨다. 유사님이 교회를 세웠고, 교인들에게 설교를 하셨다. 교회 살림을 전부 책임지셨다. 헌금이라야 별로 나오는 게 없었으니, 실상은 모든 재정을 투자하면서 오직 소명감으로 교회를 운영하셨다. 그나마 농사를 지으시되 어느 정도 잘 사는 축에 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큰형과 같은 나이의 아들 하나뿐이어서 사실만 했을지도 모르겠다.
군너미는 우리 집에서 4킬로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그 집에 질러가려면 인적 없는 산길을 넘어야 했다. 엄마는 그 길을 새벽에 넘으셨다.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아침에 여자가 집에 찾아오면 재수 없다고 터부시하던 때, 그나마 그런 미신을 믿지 않는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다행이었다. 엄마는 거두절미하고 위엣 말씀만 하셨다. 그 말씀을 하실 때마다 그분들을 향한 고마운 마음을 생각하시면서 눈물을 짓곤 하셨다.
오죽하면 부엌에서 불 때는 것을 거들면서 아무 말씀도 못하고 그냥 계셨을까. 산길을 오가시면서 엄마는 얼마나 많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하셨을까? 산길을 넘으시면서 얼마나 많은 생각이 교차하셨을까, 만일 허유사님댁에서도 돈을 빌리지 못하면 어떡하지 그 생각으로 무서운 것도 모르시고 그 산길을 걸으셨을 터였으리라. 아무 말씀도 못하시고 부엌에서 눈물만 흘리실 때의 심정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되돌아 산길을 넘어오시면서 엄마는 어떤 생각을 하시면서 오셨을까? 자식이란 세월이 흐르면 그 모두를 잊고 당연한 듯 살아간다만, 엄마 마음은 자식 잘 되었으니 보람으로 여기시지만, 때로 서운할 때면 그때 그 일이 떠오를 터,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한 엄마는 평생 그런 저런 업보 카르마를 안고 사셨던 듯싶다. 책임감이 강한 패자, 엄마는 카르마의 승자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