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63- 상처 난 나뭇가지가 관솔을 만들 듯
예수님의 천국의 비유 중에 씨 부리는 비유가 있다. 한 농부가 밭에 나가 씨를 뿌리러 나간다. 그 씨앗들 중 더러는 돌에, 더러는 길바닥에, 더러는 가시나무 밑에,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진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을 제외한 나머지 씨앗들은 나름의 이유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 돌에 떨어진 씨앗은 싹은 내지만 햇살에 금방 말라죽는다. 길바닥에 떨어진 씨앗은 싹을 내기도 전에 새가 주워 먹어 버린다. 이 중에 가시나무 밑에 떨어진 씨앗은 처음엔 싹을 잘 내고 잘 자라지만, 오히려 웃자라지만, 비가 오고 바람이 한 번 부니 쓰려져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비유이다. 이 비유를 설명하거나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장애 없이 자라는 식물들이 어떤 시련을 당하면 맥을 못 쓰듯, 소나무 가지들도 마찬가지이다.
어렸을 적에 겨울이면 쥐불놀이를 많이 했었다. 깡통을 구해서 밑에 구멍을 숭숭 뚫은 다음, 거기에 나뭇가지를 담고 불을 붙여 돌리면 불길이 둥근 원을 이루는 모습이 아주 볼만했다. 이때 가장 좋은 연료가 바로 소나무 가지가 변한 솔갱이였다. 다른 말로는 관솔이라고도 했다.
관솔은 잘린 소나무가지가 마르면서 진이 나와 옹이진 것을 말한다. 관솔은 나뭇가지가 잘려나가고 나무 본체에 붙어 있는 부분, 나무에 오를 때 밟고 올라가기 좋은 튀어나온 부분을 말한다. 이런 관솔은 자연적으로 나뭇가지가 잘려나가거나 자연적으로 부러진 부분엔 생기지 않는다. 때문에 요즘 숲속 소나무에는 관솔을 보기가 어렵다. 소위 나무에 오르려면 밟고 올라갈 튀어나온 옹이가 별로 없다.
이전에는 주로 나무를 땔감으로 이용했으므로 소나무 자체는 살려두고 나뭇가지를 낫으로 잘라서 땔감으로 이용했다. 이때 나뭇가지가 잘려나가고 나무에 붙은 부분에선 송진이 나오면서 상처를 굳혔다. 때문에 남은 부분은 아주 단단하게 굳었다. 이렇게 남은 것이 관솔이었는데, 우리는 이것을 솔갱이라 불렀다. 이 솔갱이가 쥐불놀이하는 연료엔 단연 최고였다. 물론 그렇게 못하면 싸리나무를 연료로 이용하기도 했다.
정월 대보름날이 가까우면 아이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쥐불놀이를 위한 깡통 하나쯤은 가졌다. 밤에 놀 생각으로 아이들은 산에 가서 솔갱이를 땄다. 나뭇가지를 자를 때 다음에 올라가기 위해 비교적 길게 남겨두었기 때문에 솔갱이는 나무마다 있었다. 준비한 솔갱이를 챙기고 저녁이면 들로 나갔다. 11월이면 눈이 내려서 쌓였고, 눈은 겨우 내내 들을 덮고 있었으므로 불을 낼 염려는 없었다. 혼자 깡통을 돌리려면 재미가 없으므로 아이들은 모여서 돌리는 곳이 따로 있었다. 아이들이 돌려대는 불 깡통은 멀리서 보면 둥근 원을 그려서 아주 멋졌다. 가끔 메마른 풀을 넣고 돌리면 불꽃들이 사방으로 날려서 하늘을 수놓았다. 마치 불꽃놀이를 하는 광경을 연출했다.
재미는 재미를 낳았다. 깡통을 돌리다가 아이들은 편을 갈라 쥐불 깡통 싸움을 했다. 단단한 철사를 줄로 삼아 깡통을 돌린다 해도 약한 끈은 있게 마련이었다. 서로 싸움을 걸면서 돌리다 보면 줄과 줄이 엉켜 한 쪽은 끊어지게 마련이었다. 그러면 끊어진 아이가 지는 셈이었다. 그것도 성에 안 차면 편을 갈라 싸움을 벌였다. 이때는 용기가 있는, 담력이 강한 대장이 있는 편이 이겼다. 대장의 담력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었다. 겁을 먹고 물러나기 시작하면 뒤에 따르는 아이들은 마치 오합지졸과 다를 바 없이 도망치기 바빴다. 짓궂은 아이는 버려진 고무신짝을 주워 두었다가 불 깡통에 담아 휘둘렀다. 그러면 치직 소리를 내며 타는 고무는 휘두름에 따라 진한 불꽃 가루를 이루며 튀어나가 상대 아이의 뺨에 붙어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이걸로도 만족을 못하면 다른 동네로 원정을 떠났다. 한 번은 넓은바위 마을 까지 원정을 떠났다. 쪽수를 어느 정도 확보하고 신작로를 통해 멀리 4킬로미터까지 가는 원정 싸움은 전쟁이라도 떠나는 양 의기양양했다. 나야 오합지졸로 뒤를 따랐고 선두엔 상급학년의 형들이 맡았다. 신작로에서 맞닥뜨린 패거리는 일전을 불사하고 신나게 불 깡통을 휘둘러댔다. 그야 말로 볼만한 풍경이었다. 당연히 원정을 떠난 우리가 불리했다. 처음엔 소수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상대편은 쪽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도망을 치면서 한 형이 휘두르던 불 깡통이 그만 끈이 끊기면서 박이장 네 지붕에 떨어졌다. 놀란 우리는 잽싸게 도망을 치고 말았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집에 불이 나지 않았을까 염려되었다. 다음날 학교에 가면서 슬쩍 그 집을 보았더니 다행히 그대로였다.
이제는 이러한 놀이들도 흔적 없이 사라지고 볼 수가 없다. 멀리서 바라보면 아주 멋진 원을 그리며 돌던 불 선, 거기서 튀어나오는 불꽃들이 사라져가는 위로는 투명한 별들이 반짝거렸던 풍경을 다시는 볼 수 없다. 그런 풍경에 대한 회상이든 추억이든 그리움이든 그런 것도 떠오르지만, 이 아침엔 쥐불놀이를 회상하면서 솔갱이를 다시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떨어뜨리어져 나간 자리엔 남지 않는 솔갱이, 갑작스러운 상처를 입고서야 그것을 치유하려고 뿜어낸 송진 덕분에 단단한 솔갱이를 만들어내는 자기 치유력, 그와 같은 삶을 떠올린다. 아픔을 겪은 소나무가 상처를 아물게 하여 단단하고 오래 타며 화력이 강한 관솔을 만들어내듯, 살다보면 필연적으로 겪는 아픔들, 고통들도 아물게 하려 노력하다 보면 보다 나은 나로, 보다 발전한 나로 성장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이 이침에 다시 생각한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노랫말이 있듯이, 당해야 할 삶의 상처라면 관솔 같은 삶으로 만들어가야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