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64- 팽이를 치거나 돌리거나
“동네 꼬마 녀석들 추운 줄도 모르고 언덕위에 모여서 할아버지께서 만들어주신 연을 날리고 있네.”
어쩌면 겨울은 나 때 농촌 아이들에겐 제일 신나는 계절이었다. 봄 내내, 여름 내내, 가을 내내,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놀 수 없었다.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 직접 농사일은 아니라도 소를 보거나 아이를 보거나 토끼풀을 뜯거나 하다못해 들로 나가는 밥 심부름을 하거나 막걸리 주전자라도 들어야 했다. 경ㄹ이 되어야 이 모든 일들에서 해방 되고 마음껏 놀 수 있었다. 어른들 역시 땔감 마련 외에는 할 일이 적은 농한기였다.
겨울철이면 실내에서 또는 얼음이 언 논바닥에서 하는 놀이로 팽이치기나 팽이 돌리기가 있었다. 외부에서는 팽이치기 실내에선 팽이 돌리기를 했다. 치는 팽이와 돌리는 팽이가 따로 있었다.
우선 실내에선 팽이를 치기보다는 돌렸다. 시장에서 사온 팽이가 있었다. 줄을 감았다가 갑자기 잡아당기면서 바닥에 놓으면 울긋불긋 무늬가 빨간 줄 흰줄로 변하면서 도는 팽이였다. 하지만 이 팽이는 얼마나 잘 돌리느냐에 따라 더 오래 돌 뿐 때리는 팽이는 아니었다. 처음 돌린 힘만큼 돌고 나면 쓰러졌다.
이 팽이를 응용해서 아이들은 팽이를 만들어 돌렸으니 병뚜껑 팽이 또는 종이 팽이였다. 병뚜껑 팽이는 소주병 뚜껑으로 만들었다. 병뚜껑을 두드려서 펴면 제법 넓은 원모양이 되었다. 중앙에 못을 박아 구멍을 뚫은 후 구멍에 성냥 개피를 꼽아 황이 있는 부분이 바닥에 닿도록 하고 성냥개비에 힘을 주어 돌리면 제법 돌았다. 그렇게 만든 팽이로 누구 팽이가 더 오래 도나를 시합하기도 했다. 이렇게 만든 팽이는 주로 방안에서 돌렸다. 시합을 할 때는 내기를 걸었는데 성냥개비 따먹기였다. 작은 성냥 한 갑에는 20여 개비가 들어 있었는데 이길 때마다 한 개비 또는 두 개비를 걸고 시합했다. 때문에 성냥 한 갑이면 하루 종을 놀 수 있었다. 성냥을 다 잃으면 성냥갑은 그대로 갖고 있다가 집에 있는 통 성냥인 유엔이나 백마표 성냥 통에서 몰래 훔쳐서 채웠다가 나중에 시합용으로 쓰곤 했다. 이렇게 돌리는 팽이는 눈이 많이 오거나 너무 추운 날에만 방안에서 돌렸다. 눈이 많아 오면 빙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팽이다운 팽이는 맞을수록 잘 도는 팽이였다. 눈이 그치면 비록 울퉁불퉁하지만 언 마당에서 팽이를 돌렸다. 최적의 장소라면 얼음이 잘 언 논바닥이었다. 그러 논바닥에는 동네아이들이 모여서 팽이치기 경연을 하곤 했다.
팽이를 시장에서 구입한 것은 아니었다. 집에서 깎아야 했는데, 아이들 스스로 깎지는 못했다. 어른들이 깎아주어야 했는데, 제일 좋은 팽이는 박달나무로 깎은 것이었고, 그 다음이 벚나무나 자작나무로 깎은 것이었다. 팽이채는 어른들이 만들어주지 않아도 아이들이 스스로 만들 수 있었다. 어른들이 깎아준 팽이가 아닌 어디선가 사온 팽이는 황부자집 아이들만 갖고 놀았다. 울긋불긋한 색깔의 팽이로 팽이 밑에 철심이 박혀 있었다.
팽이를 돌리는 방법은 팽이에 끈을 착착 감았다가 훽 바닥으로 집어던지면 줄이 풀리면서 팽이가 돌았다. 비틀대며 돌던 팽이를 쓰러지기 전에 때려서 살려내고 넘어지지 않도록 잘 관리하며 때려야 했다. 팽이는 그대로 내버려두면 오래지 않아 힘을 잃고 비틀거리다 쓰러지고 말았다. 때문에 얼마나 잘 관리하며 잘 때리느냐가 팽이를 잘 돌리는 기술이었다. 세게 연속해서 때리면 때릴수록 팽이는 더 빨리 잘 돌았다. 그렇다고 세게 연속해서 자주 때린다고 팽이를 잘 돌리는 것은 아니었다. 나름의 기술이 필요했는데, 팽이가 비틀거리지 않도록 정확하게 위치를 잘 잡아 때리는 게 기술이라면 기술이었다.
팽이를 가진 동네 아이들이 모여들어 누구 팽이가 더 오래 도나를 시합하면서 하루 종일 놀다시피 했다. 그때는 그냥 놀이였다. 원리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팽이의 의미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놀이였다. 그 자체로 즐기던 시절, 돌아보면 그때가 좋았다.
그런데 지금은 무엇을 하든 가치를 따지고 의미를 찾는다. 철이 들었다는 긍정적인 뜻도 있을 테지만,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그냥 놀이면 놀이에, 일이면 일에 열정을 쏟으며 사는 게 행복이 아닐까 한다. 이제 철든 척하려니 팽이치기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그러다 보니 놀이는 놀이가 아닌 일로 바뀌어 재미가 덜하다. 그러니 어쩌랴. 나이든 꼰대처럼 의미를 찾아야 하는 이 마음을. 하여 팽이가 주는 교훈 하나 시로 남긴다.
비틀거리며 중심 잃은 너를
채찍질하는 내 손에
열 식은 땀이 아리게 배어나온다
자칫하면 쓰러지기 쉬운 세상
쓰러지면 그만인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중심을 잡고 서야지
너를 때리는 내 사랑을
네가 제대로 알까마는
중심을 잃는 너를 그냥 둘 수 없으니
또다시 너를 매로 다스린다
잠깐 방심하면 쓰러지기 쉬운
넘어지면 다시 일어설 기회 없는
차가운 세상을 아직 알지 못하는
너의 중심을 잡아주겠다고
매를 든 내 손에 땀이 잡혀 식는다
세상이 도는 것이냐
네가 도는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