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65- 스키 타기를 하는 날이면
나 살던 곳, 홍천하고도 내촌, 내촌하고도 광암리, 해발 700미터나 가 넘는 산골 마을엔 겨울이면 눈이 무척 많이 내렸다. 보통 11월에 눈이 내리면 눈은 녹기 전에 다시 눈이 내려 쌓였다. 그렇게 겹겹이 겨우 내내 눈이 내리면 응달에는 겨울 동안 허리춤 이상이 쌓였다. 그토록 많이 쌓인 눈은 겨우내 있다가 봄이 제법 깊어야 녹았다.
지금과 달리 나 어렸을 때 겨울이면 어른들도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땔감은 겨울이 오기 전에 마련해야 했으니까, 틈나면 나무를 하거나 토끼몰이를 하거나 아니면 자리를 짜거나 하는 일들뿐이었다. 때문에 눈이 내리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편안히 쉴 수 있었다. 너도 나도 일을 할 수 없으니 어른들 역시 마음 편했으리라.
아이들은 눈이 많이 왔다고 집 안에 그냥 있지 않았다. 밖으로 놀러 나왔다. 아주 어린 아이들은 비교적 짧은 거리의 언덕진 밭에서 비료 포대를 타고 놀았다.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은 그런 것은 시시해서 타지 않았다. 대신에 스키를 탔다.
스키는 어른이 깎아줘야 했다. 비교적 곧게 자라고 어느 정도 굵은 나무들 중에 굴참나무를 이용한다. 스키는 길이가 길수록 더 잘 나가기 때문에 가능한 한 길게 자른 다음, 그것을 반으로 쪼갠다. 두 쪽으로 나오면 갈라진 면은 평평하고 곱게 다듬은 다음, 뒷면은 약간은 둥그스름하게 반들반들할 정도로 잘 깎는다. 그러면 그럴 듯한 스키가 된다.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앞부분은 활 모양으로 깍은 다음, 앞부분을 소죽 끓이는 가마솥에 담그거나 불에 넣었다가 조금 부드러워지면 나무 턱 같은 곳에 앞부분을 넣어 적당하게 앞부분이 올라오도록 휜다. 그렇게 한참 상태를 유지하도록 눌러 놓으면 앞부분은 약간 들린 스키 모양이 나온다. 거의 완성된 스키에 가운데에서 조금 앞부분쯤에 발을 낄 수 있도록 양쪽에 송곳 같은 것을 불이 달궈 구명을 뚫은 다음 철사로 양쪽을 연결하여 발걸이를 만들면 드디어 완성이다.
아버지는 스키를 잘 만들어주시곤 했다. 나무를 쪼개는 솜씨가 수준급이셨던 아버지는 기꺼이 굴참나무를 베어다 가능하면 길게 쪼개셨다. 가리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 형제들에게 각각 하나씩 깎아주시곤 했다. 작은형에겐 더 길게 만들어주셨고, 나에겐 조금 짧게 만들어주셨다. 스키는 길면 길수록 속도가 빠른 대신 위험스러웠고. 작을수록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비교적 안전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께서 스키를 만들 때면 설레는 마음으로 그것을 지켜보곤 했었다.
완성된 스키를 들고 집에서 나오면 20여 미터만 가도 경사가 급격한 밭이 있었다. 길이가 200여 미터는 됨직한 경사진 밭은 천연의 스키장이었다. 밭이 끝나는 하단 부분엔 다랑논이 이어졌다. 논두렁 높이가 2미터는 족히 되는 논들이었다. 때문에 위에서 내달리다 약간 평평해지는 곳에서 멈추지 않고 직진하면 논두렁을 넘어 점프를 하듯 논바닥에 안착할 수 있었다. 정지하거나 속도를 늦추고 싶다면 지게작대기를 이용하면 되었다. 물푸레나무로 만든 지게작대기, 평소에는 지게를 받치는 데 쓰지만 스키를 탈 때는 스키 지팡이로 사용했다. 하나만 이용하여 속도가 빨라지면 힘차게 누르면 속도는 줄었다. 멈추고 싶으면 있는 힘을 다해 누르면 스키는 멈추었다. 실력이 늘면 늘수록 지팡이에 힘을 가하지 않고 중심을 잡는 정도로만 사용했다. 처음엔 거의 무릎앉아 자세로 타다가 실력이 늘면 점차 허리를 세웠다.
하여 아이들은 누가 더 멀리 나갈 수 있나를 시합했다. 경사진 곳에서 지팡이에 힘을 가하지 않을수록, 스키의 길이가 길수록 경사진 곳을 지나 평지에서 더 멀리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하루종일 우리 집 앞밭에서 놀았다. 때로는 아래 평평한 밭을 지나 논두렁을 타넘고 점프하는 묘기를 부리면서 하루 종일 배고픈 줄 모르고 스키 타기를 즐겼다. 물론 내려갈 때는 신났다. 하지만 다시 타러 올라올 때는 발고리에 지팡이를 끼어 어깨에 들러메고 눈밭을 걸어 올라와야 했다. 그러니 오를 때는 힘들고 내려갈 땐 신났다. 짧은 동안에 내려가는 신나는 순간을 위해 한참 어려운 걸음을 해야 했다. 그래도 그때는 마냥 좋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던 어린 시절의 스키타기, 내려갈 때는 환호성을 지르며 내리 달리고, 오를 때는 서로 히히덕거리면서 언덕을 오르던 어린 시절, 지금도 눈이 내리는 날이면 그때 그 시절이 그립다. 한편으로는 머리에 먹물이 좀 들어왔다고 그 시절의 그 모습이 마치 시시포스의 신화에 나오는 시시포스와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신들의 미움을 받아 죽음을 맞고, 죽어서 지옥에 간 시시포스, 그는 언덕 위로 돌을 굴러 올리는 벌을 받는다. 그럼에도 그는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돌을 굴러 올린다. 언덕 위에 올려놓은 돌은 여지없이 다시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시시포스는 다시 언덕을 가볍게 내려와 다시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을 굴러 올린다. 어린 시절 나 역시 그런 연습을 한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으로 싱긋 미소를 짓는다. 어리든 나이 들었든 누구의 삶이든 다 고만고만 닮았구나 하는 생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