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3- 춤추는 노란 옥수수

영광도서 0 510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란 노래 가사처럼 유년의 기억들은 서로 순서가 명확하지 않다. 다만 학교 들어가기 전이거나 학교 들어간 후만 맥락으로 구분할 수 있을 뿐이다. 망망대해에 점점이 떠 있는 어느 섬들처럼, 각기 떨어진 기억들은 선명하지만 서로 연결이 안 된다. 만일 기억들 전체를 하나의 대지로 비유하면, 여기 저기 선명히 떠오르는 기억들 외엔 사멸되어 비어 있다고나 할까. 잊힌 기억들이 수없이 더 많다. 그러니 기억들을 서로 연관시키거나 연결할 필요가 없이 그냥 기억나는 것만 서술해야겠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셨다. 비료를 제대로 구하지 못하셨는지 양분이 부족한 옥수수들이 배리배리하게 제 구실을 못하고 노란색을 띠던 옥수수들이 눈에 선하다. 자식들은 줄줄이 많지, 돈은 물론 먹을 양식도 부족하지, 그러니 사람도 굶는 판에 곡식들이라고 뾰족한 재주가 있으랴.

 

가난은 가난을 낳는다. 가난에서 벗어난다는 게 남이 보기엔 한심할지 몰라도, 당사자가 아니면 그 아픔을 모른다. 비료를 못 구하니 소출은 말도 아니다. 28,000원에 산 농지와 초가집, 그게 전 재산이니 그해 농사를 지을 비료를 못 구하신 탓이다. 당연히 아무리 애를 쓴들 가을에 거두어들일 곡식이 얼마나 초라하랴.

 

주식은 나물죽이었다. 산에서 뜯어온 나물을 잔뜩 넣었다. 곡식 낟알이라곤 옥수수를 타갠 알들이 전부였다. 타갠 옥수수밥도 제대로 먹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죽을 쒀야 낟알 몇 알로 온 식구가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큰 대야에 가득한 죽, 어린 아이들도 한 냄비는 족히 먹었다. 그렇게 배를 채우면 배는 아래 거시기가 안 보일 정도로 툭 튀어나왔다. 요즘 텔레비전에서나 볼 수 있는 아프리카 아이들처럼. 그렇게라도 배를 채우면 포만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물죽이란 조금만 지나면 배가 푹 꺼졌다. 금세 배가 고팠다.

 

그나마 죽도 마음대로 쑬 만큼의 곡식도 없었다. 후일 엄마는 가끔 그때 설움을 말씀하시곤 했다. 이웃집 모씨네 집에 옥수수 몇 되박이라도 빌려달라고 갔더니, 그나마 사람 먹을 수 있는 옥수수가 아니라 누렇게 뜬 옥수수 닭이나 줄 옥수수 세 되박을 주더라고. 다른 이웃 한 분은 안타깝게 여기며 기꺼이 빌려주더라고. 그 동네서 우리 집은 가장 가난했다. 식구로는 풍요로웠다. 족히 여덟 식구였으니.

 

그때는 몰랐다. 엄마의 마음을. 아버지는 아주 착하셨다. 남에게 굶어죽더라도 아쉬운 소리를 못하셨다. 궂은일은 엄마의 몫이었다. 돈을 빌리든, 곡식을 빌리든 엄마가 나서야 했다. 나서지 못하는 성격의 아버지 마음도 오죽했으랴만 엄마는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아이들을 굶길 수는 없었을 태니까. 내 기억에 엄마의 증언을 보태면서 같은 기억이라도 서로가 달라도 아주 다름을 알았다. 나는 그저 유년의 동화처럼 기억했다. 그것이 그토록 아리고 쓰린 일이었는지 몰랐다. 그냥 옛날이야기처럼, 어니면 동화 속 장면처럼 오히려 낭만적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기억을 들추면 엄마가 보태는 기억의 편린들은 설움이었다. 가난의 설움, 엄마는 아픔으로 기억했다.

 

거름을 제대로 얻지 못한 옥수수들이 바람에 애처롭게 흔들리던 모습이 아직 마음에 어린다. 애련한 동화 속 장면처럼. 철없는 아이에겐 정겨운 그림 같은 장면, 노란 옥수수들이 바람에 한들한들 춤을 춘다. 그걸 바라보는 아버지는, 엄마는 어떠셨을까? 제대로 키를 못 키우는 옥수수, 거름을, 비료를 못 먹어 자라지도 못하고 튼튼하지도 못한 옥수수들, 저것들 가을이면 이삭은 나올 테지만 이삭이 크지도 못할 뿐더러 맺히다 말 낟알들, 그걸 생각하며 안타까워했을 부모님의 마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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