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6- 아버지가 화전을 일구던 날

영광도서 0 451

내가 옳다, 옳았다, 옳을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기억은 온전하다고 믿는다. 자신의 기억을 믿는 한에 있어서 누구나 자신의 기억을 믿고, 대신에 다른 사람의 기억은 옳지 않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같은 사건을 기억하되 자신의 기억을 믿는다면 다른 사람의 기억이 잘못 기억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때문에 서로 자신이 옳다고 옳고 그름을 논한다. 현재를 중심으로 옳다고 한다. 과거의 일을 현재에서 보아 앓았다고, 그러니 미래를 시점으로 잡아 옳을 것이다, 이처럼 누구나 자신을 옹호한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확실하다고 믿은 나의 기억이 그릇된 때도 더러 있다. 내 기억이 나를 속인다. 때문에 어떤 사안에 대해 너무 과신하지도, 너무 고집하지도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랬다.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 하나, 네 살 생일 때 이사 와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0년 동안 농사를 지으며 산 곳이나, 지는 온 곳이니 나의 어린 시절과 사춘기를 보낸 마을, 산 속의 산들로 겹겹이 둘러싼 마을이었다. 면소재지에서 높은 산을 넘어 가족고개를 넘어오면 첫 동네, 고개 넘어 차바퀴 자리만 풀이 없고 길 가운데엔 풀이 듬성듬성 자란 신작로를 따라 내려오다가 좌측으로 소로를 따라 들어가면 우리 집은 거기에 있었다. 그 집에서 건너편, 고개를 넘어 그런 대로 곧은 척 구불구불 뱀처럼 산발치를 따라 내려온 신작로 우측으로는 산이 이어졌다.

 

농사지을 땅이 많이 부족했는데 아버지는 그 산에 화전을 일구셨다. 국유림이기 때문에 완전히 불법이었다. 산림간수에게 들키면 안 되었다. 때문에 화전의 조건은 산 가운데여야 했다. 산림간수는 그 귀하디귀한, 차라리 신기한 오토바이를 타고 감시를 다니곤 했다. 길에서 보면 빙 둘러 산일뿐이기 때문에 가운데에 있는 밭은 보이지 않아야 했다. 그래서 그런 입지에 화전을 일구면 들통 날 일은 거의 없었다.

 

산림간수가 오지 않을 시간은 밤이었다. 아버지는 비탈지긴 했으나 밭이 될 만한 곳을 골라 불이 넘어가지 않도록 화금을 충분히 그으셨다. 그리곤 산꼭대기 쪽으로 올라가서 아래쪽으로 화금을 따라 불을 놓으셨다.

 

불이란 오르막으로는 활활 타지만 아래쪽으로는 뒷걸음으로 살금살금 내려오는 모양새로 탄다. 어느 정도 충분히 불이 위로 오른들 위험하지 않다는 판단이 서면 아래까지 화금을 따라 빙 둘러 불을 놓으면 수 시간이면 꽤 많은 산을 태운다. 그렇게 공간을 마련하고 톱, 낫, 괭이로 죽은 나무를 베고, 나무뿌리 풀뿌리를 캐내면 그곳이 화전이다. 이듬해에 감자를 심으면 비료를 주지 않아도 농사는 잘된다. 그렇게 화전을 일구면 소유권이야 당연히 나라 땅이지만 관습으로는 화전을 일군 사람의 땅이다.

 

화전을 일구고 이듬해 이른 봄에 엄마와 아버지는 그 곳에 밭을 정비하러 가셨다. 화로불가엔 작은형, 두 살쯤이나 되었을 동생 그리고 나 셋이 있었다. 엄마를 기다리던 동생이 배가 고픈지 마구 울었다. 달랠 방법이 없었다. 그러자 작은형이 화로불에 박혀 있던 인두를 꺼내 기저귀를 찬 동생의 넓적다리 부분을 지졌다. 지지직 소리와 함께 살 익는 소리가 났다. 동생은 울음을 그치기는커녕 더 우렁차게 울었다. 그렇다고 건너편 화전을 일구는 중인 엄마가 아실 리 없었다.

 

어떻게 그 일이 수습이 되었는지는 기억에 없었다. 다만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 일이 내가 당한 것으로, 작은형이 내 넓적다리를 인두로 지진 것으로 기억했다. 모두 어른이 되어 어느 설날 모였을 때 지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내가 그 이야기를 꺼냈다. 동생이 운다고 작은형이 동생 대신 내 넓적다리를 인두로 지졌다면서 확신 있게 말했다. 내 말에 작은형이 말도 안 된다면서 ‘니가 아니라 0현이였다’는 것이다. 내 생각엔 분명 내가 지짐을 당했다고 기억했다. 그런데 내가 잘못 기억한 거였다. 확인해보니 증거가 확실했으니까. 동생의 넓적다리엔 지금까지 살모사 대가리처럼 생긴 인두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으니까.

 

그때까지 나는 내 기억이 옳다고 믿었다. 그렇다고 우겼다. 그런데 증거가 확실했다. 내 기억의 왜곡이었다. 기억이란 놈이 주인을 속인 거였다. 내 말이 옳다고 우긴 내가 머쓱했다.

 

그 일 이후로 나는 나의 기억을 완전히 믿지 않는다. 내 기억이 그릇될 수 있음을, 기억이 왜곡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기억에 의지해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믿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니 그저 사람이란 언제나 남의 말을 우선 들어주는 자세가 필요하겠다 싶다. 겸손이란 그래서 미덕이겠지.

 

기억들도 굽이굽이 산길 따라 오르듯 사그라진다. 지난 추억이니 정겹게 지난 얘기 하던 날들도 이제는 나이와 함께 사라진다. 그나마 형제들이 모여 지난 일들을 들추어내던 모임의 기회도 거의 없다. 한 집에 여러 식구가 울고불고 싸우고 시샘하면서도 먹을 것은 조금씩이라도 나누던 그때 그 시절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으나, 이야기 들추어낼 기회가 없다. 초가집 안에 화롯불, 툭툭 익어가던 옥수수 그리고 콩알, 이젠 머언 먼 옛날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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