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1- 까치설날의 풍경

영광도서 0 493

“그때는 그랬지.”

 

생각할수록 정겨운 말이다. 워낙 빠르게 지나가는 시대인지라 그때를 이야기할 시간도 없다. 이 말 ‘그때는 그랬어!’라고 화두를 꺼내거나 누군가 하는 이야기를 듣다가 은연중에 ‘맞아. 그때는 그랬지!’라고 응답하며 이야기를 잇는 상황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은 형제자매들이 모인 자리거나 어린 시절 함께한 소위 불알친구 사이거나 아니면 동시대를 산 이들이 모인 자리에서나 나올 법한 말이다. 그런데 지금 일어나는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바쁘니 언제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랴.

 

그때는 그랬지. 얼마나 정다운가! 정말 지겹도록 한 놈은 이쪽 한 놈은 저쪽, 서로 옳은 이야기, 정치 이야기만 해대니, 어떤 놈이 옳은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그래서 ‘그때는 그랬지’ 이 말이 더 그립다. 색 바랜 모든 일은 아프지 않고 슬프지 않고 정겨우니까.

 

설날 이야기를 해 볼까. 설날이 오면 설빔도 설빔이지만 먹을 게 좋아서 좋았다. 우선 아무리 가난해도 떡은 했다. 쌀이 없으니 우리 집은 쌀떡은 못했다. 옥수수떡을 했는데, 찰옥수는 소출이 적기 때문에 찰옥수수로 떡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메옥수수로 떡을 해야 해서 일단 찰지지 않았다.

 

옥수수떡은 색깔이 누렇다. 옥수수 알이 그대로 한 몸인 듯하지만 옥수수알도 요령껏 물에 담갔다가 꺼내면 아주 얇은 껍질이 벗겨진다. 그렇게 겉껍질을 벗기면 옥수수 알에서 까만 눈이 보일만큼 하얀 옥수수 알로 변신한다. 맛이야 크게 달라지지 않지만 떡으로 만들면 일단 색깔은 쌀떡처럼 희다. 물론 그렇게 만든 들 옥수수떡은 끈기도 없고 맛은 별로다. 맛은 쌀떡이 최고지.

 

쌀떡을 해 먹는 집은 한두 집이고 나머지는 옥수수떡이거나 찰조떡을 했다. 곡식 중 조는 찰조와 메조가 있다. 뫼조는 주로 다른 곡식에 섞어서 밥 지을 때 썼고, 찰조로 설날이 오면 떡을 했다. 찰조로 만든 떡은 색깔은 노랗다 해도 찰지기는 찹쌀떡 못지않았다. 맛도 그런 대로 괜찮았다.

 

떡거리를 준비하고 설날이 오기를 기다리다 설 전날이면 이집 저집 떡을 친다. 때로는 동네 청년들이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떡을 쳐주곤 한다. 떡치는 일이 쉽지 않아서다. 넓은 마당에 소 여물통 비슷하게 생긴 떡귕을 내놓는다. 가루로 만들어 찐 반죽을 그 안에 넣고 양쪽에서 떡메를 든 장정 둘이 서로 엇갈리게 박자에 맞추어 쳐댄다. 그러면 부서질 듯 맥이 없던 가루들이 단단히 뭉쳐지기 시작한다. 아낙네는 가끔 손에 물을 묻혀 가면서 반죽을 정리하고 장정들은 한참을 쳐단다. 많이 칠수록, 힘차게 칠수록 끈기 없던 떡은 찰져진다.

 

집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아니라 이 계곡에 한 집, 저 계곡에 한 집, 비탈에 있었지만 떡을 치는 울림소리는 산에 부딪쳐 메아리쳤다. 그 소리와 함께 입맛을 다셨다. 비록 옥수수떡이지만 배불리 먹을 수 있으니 설날은 좋았다. 그렇게 떡을 만들면 집집마다 돌려가면서 나누어 먹었다. 심부름은 우리 형제들 몫이었다. 온 동네를 다 나누지는 않더라도 주변에 나누어 먹는 집이 열 집은 족히 되었으니 떡 심부름을 하려면 거리로는 10키로는 걸아야 했으리라.

 

떡을 담아간 그릇은 일단 서로 돌려주지 않았다. 그랬다가 다음에 나눌 것이 생기면 그 그릇에 담아서 보내거나 받았다. 이렇게 서로 무엇이든 특별 식이 생기면 이웃끼리 반드시 나누었다.

 

설 전날은 이렇게 분주하게 어른들은 떡을 하느라 바빴고 아이들은 떡 심부름을 하느라 바빴다. 특히 내가 바빴다. 나는 7남매 중 딱 중간이라, 위로 형 둘, 누나 둘, 아래로 동생 둘이라, 위로는 나이가 많다고 심부름 안 시키고, 아래로는 어리다고 안 시켜서 심부름은 나의 몫이었다. 그런데다가 나는 아주 말을 잘 듣는 아이였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부지런하고 말 잘 듣는 사람들은 항상 바쁘고 피곤한 건 맞는 것 같다. 소위 독립가옥들 산모퉁이 돌아서 한 집, 또 다른 산모퉁이 돌아가면 한 집, 산비탈에 지은 집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광암리 가족동,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날 그 풍경들이. 파란 하늘이라도 쳐댈 듯 공중으로 떡귕으로 오르내리던 떡메의 오르내림이 선하고, 산을 울리는 떡치는 울림소리가 들릴 듯하다.

 

‘그때는 그랬지!’ 글을 쓰며 혼잣말로 추억 속으로 돌아간다. 지금은 옛사람이 된 어른들, 어디선가 늙어갈 동네 형들, 그리고 친구들을 추억 속에서 잠시 소환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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