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3- 세숫대야의 소금물 풍경

영광도서 0 468

코로나19가 한창이다. 나는 전혀 볼 수 없으나 아주 작고 작지만 특수현미경으로 보면 왕관 모양이라고 하여 코로나, 거기에 2019년에 발병한 바이러스라서 코로나19란다. 왕관이란 말이 라틴어로는 코로나, 영어 역시 라틴어에서 분화한 언어이니 corona를 어원으로, 변형한 crown이다. 끔찍한 유행병이 지금만 있는 것은 아니다.

 

중세에 유럽을 휩쓴 흑사병이라고도 하는 페스트, 당시 유럽에서는 인구의 3분의 1이 이 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무려 2500만 명이 이 병으로 죽었다니 유행병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지. 공교롭게도 페스트의 발병은 중국 내륙에서 발병하여 유럽으로 퍼졌다니, 뭔 이유인지는 모르겠다. 병을 옮긴 놈이 쥐었으니, 이번엔 쥐가 아니면 박쥐란 놈은 아닐지.

 

어렸을 때도 유행처럼 떠도는 병도 적지 않았다. 아이여서 몰랐는지는 몰라도 유행병이 돈다고 한들, 달리 치료 방법이 없었다. 고뿔이든 감기든 걸렸다 하면 엄마는 누룩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밀로 만든 질금 물을 끓여서 먹이고 낫기를 기다렸다. 잔뜩 체하여 죽을 지경이 되면 소다를 먹였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진인사대천명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으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운명을 맡겼다.

 

어렸을 적엔 너나 할 것 없이 동네 아이들 대부분 몸에 헌데가 덕지덕지 났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헌데가 나면 심하면 진물이 흘렀다. 가려웠다. 긁으면 긁을수록 더 가렵고 피가 났다. 그렇다고 달리 약도 없었다. 치료 방법이라고는 소금물밖에 없었다.

 

당시엔 집집마다 소금 한 가마니씩을 필히 있었다, 그 소금 가마니는 쓰지 않는 지게에 올려놓았다. 그러면 가마니에서 소금물이 조금씩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염수를 나중에 두부를 할 때 사용했다. 그렇게 두부를 할 때 간수를 사용하고, 소금은 김장을 하거나 장을 담글 때 사용하곤 했다. 때문에 언제든 소금만큼은 늘 부족하지 않게 있었다. 그러다보니 소금은 집에 충분히 있었다.

 

이 소금을 물에 풀어 치료제로 사용했다. 세숫대야에 소금을 타서 소금물을 만들어주시곤 세숫대야에 발을 담그게 하고는, 가끔 소금물을 바르라고 시키셨다. 그렇게 형제들은 봉당에 줄지어 앉았다. 봉당이란, 타작을 하거나 낟알을 말리기 위한 마당은 필수로 있었다. 마당에서 1미터는 넘음직한 봉당이 있었다. 봉당에서 문을 열면 방이었다. 방에서 보면 문을 열면 댓돌이 있고, 댓돌 놓인 곳이 봉당이었다. 그 봉당에 소금물을 탄 세숫대야를 놓고, 시간 날 때마다 한참씩 발을 담그고 가끔 소금물을 쓱쓱 바르곤 했다. 그럼에도 헌데는 잘 낫지 않았다. 그렇다고 달리 방법이 없었다. 때문에 희망고문도 없었다.

 

그러다 세월이 더 흘러 치료제를 구해오셨는데, 요즘 약국에서 조제해주는 소염진통제만한 작고 하얀 알약이었다. 그걸 반쪽을 갈라 먹게 하셨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효력이 있었다. 가격이 얼마였는지는 몰라도 소위 문둥이약이라고 불렀다. 이 방법마저 듣지 않으면 그냥 버티는 수밖에는 없었다.

 

가렵기는 했으나, 고통스럽기는 했으나, 물론 추측일 뿐, 너무 오랜 기억이라 고통스러웠는지 생생한 기억은 없다. 다만 그렇게라도 세숫대야에 두 말 없이 발을 담그고 소금물을 쉴 새 없이 발라댔던 영상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걸 보면 그나마 그렇게 하는 것이 덜 괴로웠을 터, 꽤나 가렵고 고통스러웠을 듯싶다.

 

그런 방법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으니,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을지는 나 역시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고 나니 짐작은 간다만 그때는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요즘이 더 두렵다. 코로나19가 더 두렵다. 모르면 몰라서 두렵지 않다. 그대로 순순히 받아들이고 마니가. 달리 방법이 없다면 희망이 없어서 순순히 운명이려니 받아들이기에 두려움이 덜할 텐데, 뭔가 좀 안다고,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고, 그런 생각을 하니 두렵기도 하고, 걱정도 심하다.

 

나는 줄서서 뭐 하는 걸 엄청 싫어하는데, 엊그제는 마스크 산답시고 50분이나 서서 두 장 구입했다. 모르는 게 약, 아는 게 병이라더니 희망고문이 괴롭힌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마스크고 뭐고 그냥 살다 가련다.’ 하고 마음 편하게 살고도 싶다만, 그래도 믿어봐야지. 믿고 기다려야지. 서로 잘난 사람들이 많으니, 잘 해결해주겠지. 아니면 성경 말씀대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 말로 시간을 보내며 버텨야지. 희망고문이 더 힘들지도 모른다만. 코로나19 빨리 지나가서 이 희망고문도 빨리 끝나기를.

 

불안한 마음, 하늘이 대지에 다가와 무겁게 내리 누르는 기분이다. 신체의 고통보다 희망보다 절망이 다가올까 두렵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을 당할까? 코로나19는 피한다 해도 먹고 사는 문제, 생존의 문제가 조여 오고 있으니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할까? 세숫대야에 발 담그고 세월없이 헌데에 소금물을 바르던 어린 날의 생생한 영상이 오히려 그리운 건 그때의 가려움이나 고통을 모르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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