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70- 엄마가 본 아버지의 역사

영광도서 0 486

간밤에 시작된 비가 아직 추적추적 아침을 적시면서 내린다. 이상스럽게도 사람은 늘 호나경에 영향을 받는다. 달리 말하면 현재의 영향을 받는다. 현재의 영향을 받는다는 말은 현재의 상황이 이미 지나가 죽은 듯하던 과거를 살려내거나 추억하게 만드나 하면,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거나 꿈꾸게도 한다. 그러니 현재는 과거를 만나는 순간임과 동시에 미래를 만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렇게 아침부터 비가 내리는 날이면, 밭일이나 논일을 할 수 없는 날이면, 아버지는 혹시나 비가 너무 많이 내려 논두렁이 터질까 싶어 물 관리를 하러 비닐로 둘러싸고 논둑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면 모처럼의 낮잠을 주무셨다.

 

엄마는 바느질이며 평소에 못한 일을 하시면서 내게 지난 일들을 들려주곤 하셨다. 앞으로 어떻게 살까의 걱정을 나에게 털어놓지는 않으셨다. 철모르는 어이였을 내게 그럴 이유는 없으셨다. 엄마의 뜻은 알 수 없지만 엄마는 지난 일들을, 내가 모르는 아버지의 과거의 날들을, 당신의 과거의 날들을 틈만 나면 말씀하시고 했다. 숱한 이야기들 중 여전히 잘 기억나느니 아버지에 관한 증언이라면 증언이었다.

 

“느 아버지는 사람만 착했지, 숙맥이었지, 남들한테나 잘했지, 우리에겐 고생만 시켰단다.”로 시작하여 애증이 교차하는 아버지의 씁쓸한 과거사를 증언하셨다. 아버지와 일곱 살 차이가 나던 엄마, 열넷에 시집을 온 엄마는 아버지가 무엇을 하시던 간섭하거나 만류할 게제가 아니었다. 그냥 마음에 응어리만 키웠을 터였다.

 

그랬다. 할아버지는 아들을 얻고자 비록 할머니 둘을 두셨지만, 일제의 힘이 거기까지 적극적으로 미치지 못했음인지, 창씨개명을 하라고 면서기가 왔을 때는 지팡이로 호되게 호통을 쳐서 보낼 만큼, 다시는 집 근처에 그들이 얼씬 거리지 못하게 하셨을 만큼, 무척 완고한 분이셨지만 엄마한테는 따뜻하게 대하셨단다. 할아버지 덕분에 아버지는 소위 보급대에 끌려가지 않고 일제를 무사히 넘겼다 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면서 그래도 먹고 살 만큼의 적잖은 재산을 남기고 돌아가셨단다. 그런데 순진하다면 순진하고, 어리석다면 어리석은 아버지는 귀가 엷어서 이런 친구 저런 친구들이 꼬드겨서 애써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전답을 날리게 만들었다. 여러 곳에 있던 전답을 거의 날렸을 즈음, 6.25사태가 일어났다. 그럼에도 우리 집은 안전지대였다. 북괴가 남쪽으로 휩쓸고 지나갔을 때에도 우리 집은 <웰컴 투 동막골>의 마을처럼 주변 사람들의 피난처였다. 불당골이라고 불리던 골짜기에 우리 집이 있었다. 때문에 먼 친척들 중에 면소재지 근처에 살던 친척 중에 한 집은 기르던 소들을 인민군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우리 집에 끌어다 맡겼다가 찾아가기도 했다고 한다.

 

때문에 소위 인민군을 집 근처에 본 적은 없지만 연일 시끄럽게 울려 펴지는 총소리며 포탄 터지는 소리에 공포는 여전했다. 총알 날아가는 소리가 피융이냐 퓨웅이냐에 따라 어디쯤 떨어질지 가늠할 수 있었단다. 일제시대는 엄하고 완고하신 할아버지 덕분에, 외아들이란 명색덕분에 남들 끌려가는 보급대를 아버지는 면하시긴 했지만, 6.25전쟁은 피할 수 없을 터였다.

 

전쟁이 바람처럼 옆으로 지나갈 만큼 외딴 곳, 아늑한 곳이었지만, 그럼에도 불안요소는 여전했다. 전쟁이 발발하고 홱 지나갈 때는 무사했으나 인민군이 후퇴하면서는 우리 집도 예외 없이 훑고 지나갔다. 그때 많은 젊은이들이 길안내로 끌려갔다. 셋째고모사촌형도 길안내로 끌려가다가 도망을 치다 다리에 총상을 입고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고, 우리 바로 윗집 아저씨 한 분은 인민군 말을 안 들었더니 “돌아서라우!”하더니, 총을 쏘아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갔을 때에는 피를 얼마나 흘렸던지 그냥 업을 수가 없어서 소쿠리에 담아 지게에 지고 집에 모셔다 주었다고 했다.

 

모두들 그런 곤욕을 치를 때 아버지는 무사하셨다. 엄마 덕분이었다. 만약을 위해 엄마는 아버지의 다리에 소똥을 잔뜩 바르고 헝겊을 처매주셨단다. 아니나 다를까, 후퇴하던 인민군들이 아버지를 길 안내로 삼으려 했을 때 엄마는 아버지는 다리가 성치 못해서 잘 못 걷는다고 했다. 아버지 역시 인민군이 나타나지 일부러 절뚝거리셨다. 인민군들은 아버지의 다리에 처맨 헝겊을 뜯었다. 역기 다리가 퉁퉁 부어 있었다. 덕분에 인민군들은 아버지를 포기하고 물러났다고 했다. 엄마는 그때 일을 회상하시면서 “내가 그때 어떻게 그런 궁리를 했는지 몰라!”하시곤 했다.

 

내가 세상에 있기 전, 엄마를 통해 만난 아버지, 그래도 때로는 엄마 말씀을 잘 들으신 것 같다만. 이렇게 비가 추적거리는 날이면 들려주시던 엄마의 이야기, 공부를 한 적 없으셨으니 세상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지만,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이며, 당신이 보고 듣고 목격한 이야기들을 과장 없이 차근차근 엄마는 곧잘 말씀하시곤 했다.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그야말로 때로는 동화 같기도 했고, 때로는 슬픈 드라마 같기도 했다.

 

아직 비가 내린다, 도시가 젖는다. 아침이 온통 젖는다. 과장하지 않으면서, 목소리의 높낮이도 없으면서 조곤조곤 비 오는 날을 적시는 듯 들려주시던 엄마의 담담한 듯 조용한 목소리가 빗줄기를 타고 내려올 듯한 비 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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