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74- 온돌방이 그립다고요?

영광도서 0 555

추운 날이면 온돌방이 그립다? 윗목과 아랫목의 비유를 낳은 시절의 온돌방, 정말 그리운 걸까, 아니면 그럴 듯한 거짓말일까? 참 이상도하지. 방이라곤 아랫방과 윗방 둘, 방은 둘이지만 경계라곤 문지방 하나일 뿐, 문이라곤 있지만 문은 달리지 않은 구조, 그 안에서 여러 식구가 함께 사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아기가 만들어지고, 아기가 태어나는지, 이상도 하지.

 

어린 시절 그런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관심도 없었다. 다리 밑에서 주워 오느니 그런 말을 믿었다기보다 관심이 없어서 어른들이 밤에 무엇을 하는지, 아기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태어나는지 관심이 없으니 몰랐고, 모르면서도 자연스러웠다. 다만 갓난이기가 생기면 겨울이면 유독 추운 산골마을에서 나의 자리가 아랫목에서 윗목으로 밀려난다는 것뿐이었다. 아랫목과 윗목의 따뜻함의 차이는 천양지차였다. 더구나 아랫방과 윗방의 온도차이는 좀 과장해서 말하면 북극과 온대지방 차이였다.

 

온돌방이 그랬다. 이름만 들어도 따뜻한 기운이 나올 듯하지만 온돌방은 고루 따뜻하지 않았다. 아랫목이 뜨거워서 발을 붙이지 못할 만큼 뜨거워도, 이불을 그냥 두면 눌거나 탈 정도로 뜨거워도 윗목은 냉기가 돌 때도 있었다. 게다가 중간이 아니라면 좌우로 구석은 냉골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온돌방의 한계가 그랬다.

 

온돌은 밭이랑처럼 부엌을 시작점으로 하여 굴뚝까지 골을 만든다. 높이를 일정하게 한 낮은 둑을 쌓아 밭이랑처럼 둑과 골이 있게 만든다. 부엌 아궁이에서는 넓게 들어간 불길은 이 골을 통해 굴뚝에 이르게 하는 구조이다. 때문에 아궁이에서 가장 가까운 아랫목엔 일단 가로로 골이 하나 놓여진다. 이 가로로 놓인 골에서 여러 골이 굴뚝으로 향하도록 만들고, 굴뚝으로 나가기 전 역시 아궁이 부분처럼 가로 골이 놓이고, 하나로 합쳐져서 굴뚝으로 불길이 나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입구는 하나인데 입구에서 여러 통로가 생기고 다시 출구에서는 하나로 합쳐져서 출구가 하나인 구조이다. 이렇게 골을 만든 다음, 골을 덮는다. 골과 골의 경계를 절반씩 차지하도록 납작한 돌을 둑에 얹어 골을 덮는다. 때문에 온돌을 놓으려면 납작한 돌을 많이 구해야 한다. 일정한 두께의 돌이면 좋지만 그럴 수는 없어서 높낮이는 당연히 생기게 마련이다. 그렇게 골을 만들고 둑 위에 돌을 얹고 나면 그 위를 황토 반죽을 하여 돌 위를 덮는다. 돌의 높낮이는 달라도 황토반죽으로 덮인 방바닥은 거의 평평한 방바닥으로 탄생한다. 글허게 골과 돌을 감춘 방바닥, 그러다보니 돌이 두꺼운 곳은 흙이 얇게 덮이고, 돌이 얇은 곳은 흙이 두껍게 덮인다. 때문에 돌의 두께에 따라 빨리 뜨거워지는 곳과 잘 더워지지 않는 부분이 생기는데, 돌이 두꺼운 곳은 돌이 빨리 달아서 더 뜨겁고, 흙이 두껍게 덮인 곳은 덜 따뜻하다.

 

이렇게 완성된 온돌은 부엌 아궁이에 불을 때면 골을 통과하면서 온기가 전해진다. 웬만큼 불을 때서는 이 온기는 윗목을 거쳐 윗방까지는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온기를 전하면서 불길은 골을 통과하면서 굴뚝에 이르러 연기로 바뀌어 굴뚝 밖으로 나가 하늘로 사라진다. 바뀐다기보다 연기가 골을 통과하면서 온기를 전하는 것일 게다.

 

아무리 잘 만들어도, 굴뚝을 잘 세워도 때로 바람이 역방향으로 불면 연기가 제대로 나가지 못하고 아궁이로 되돌아 나오기도 한다. 그럴 때면 불을 때면서 눈물깨나 흘리기도 해야 한다. 그런 경험이 생기면 다시 굴뚝을 더 높게 만들기도 한다. 굴뚝이 있는 부분은 골을 한 곳으로 합치는 곳인지라 집 밖으로 나가면 봉긋하게 세워진 굴뚝대가 생긴다. 그 중간에 굴뚝을 세우는데, 굴뚝은 피나무 껍질이나 굴참나무 껍질을 잘 벗겨서 기둥처럼 세운 다음 주변을 황토 반죽을 만들어 발라서 연기가 새지 않고 굴뚝으로만 나가도록 만든다.

 

역으로 아궁이 역시 여러 골로 연기를 들여보내는 구조로 만든다. 주로 부엌에는 가운데 아궁이와 좌우로 아궁이가 있어 서너 개를 만든다. 아궁이 하나마다에 그 위에 솥을 걸게 되어 있으니 주로 가운데 아궁이에 밥솥을 걸고, 한쪽에 있는 아궁이에 가마솥을 건다. 일상적으로 밥을 하기 때문에 온기는 밥할 때 가장 많이 들어간다. 가마솥은 주로 소여물을 끓이거나 엿을 고을 때 사용한다.

 

완성된 온돌, 아궁이로 불을 넣으면 연기가 죽죽 굴뚝으로 나오면 성공이다. 실험했는데 연기가 굴뚝으로 나가지 못하고 아궁이로 역류하면 문제가 있는 것이므로 문제를 찾아 골을 다시 놓거나 혹시 흙을 바르는 과정에서 흙이 돌 사이로 새서 막힌 건 아닌지 진단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한 번 놓으면 일 년 동안 거의 고칠 시간이 없기 때문에 잘 놓아야 한다.

 

나름 아주 정성스럽게 온돌을 만들어도 일 년에 한 번, 겨울이 오기 전엔 한 번씩 손을 봐야 한다. 그때쯤이면 굴뚝과 굴뚝 주변을 모두 뜯고 장대 끝에 헝겊을 달아맨 쑤시개를 만들어 골을 훑어내야 한다. 그러면 쌓여있던 그을음과 재가 묻어나오면서 골들이 청소된다. 마치 창자를 훑은 듯이 잘 뚫어 놓으면 불길도 잘 들어가고 불을 땔 때에도 연기가 역류하지 않아 눈물도 덜 흘린다. 해마다 굴뚝 청소를 할 때면 옷도 얼굴도 까맣게 색칠이 되어야 한다.

 

온돌은 놓는 것도 기술이 필요한데, 기술이 부족한 가장을 둔 집은 아낙네가 엄청 불을 땔 때 고생해야 한다, 매번 밥을 지을 때마다 눈몰 콧물 다 쏟으면서 연기를 마셔야 하기 때문이다. 불을 때려면 불쏘시개는 필수이고, 부지깽이도 필수이다. 불쏘시개는 주로 마른 풀을 사용하고, 부지깽이는 잘 타지 않는 물푸레나무를 쓴다. 부엌에는 항상 나뭇단이 한두 단 있었기 때문에 혹시나 바람 불 때는 불이 역류할까 극히 조심해야 한다.

 

때로 연기가 밖으로 배출이 안 되고 역으로 아궁이로 나올 때면, 굴뚝을 쑤시다 더 이상 안 들어가면 길이를 가늠하여 지점을 찾아내어 온돌을 떼어내고 보면, 고양이나 강아지가 아궁이로 들어갔다가 골 안에서 죽어 있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굴뚝 청소를 하는 날이면 아버지의 하얀 광목 바지저고리는 검은 색으로 얼룩이 졌고, 아버지의 얼굴은 얼룩덜룩 검게 얼룩이 졌다.

 

온돌방 구조가 그랬다. 고백하건대 나는 글을 쓰면서 사기를 많이 쳤다. 이를테면 “이렇게 추운 겨울, 눈 내리는 날이면 유년의 시절 따뜻한 온돌방이 그립다.”고 상투적으로 쓰곤 했다. 하지만 온돌방은 아랫목을 빼고는 그렇게 따뜻하지는 않았다. 요즘의 보일러는 뜨거운 물이 호스를 따라 잘 돌아다니면서 고루 따뜻하게 하지만 온돌은 그럴 수 없는 구조였다. 마치 부익부 빈익빈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아랫목과 윗목이랄까.

 

글쎄다, 아랫목 윗목 구분이 확연한 그때가 좋았을지, 양극단을 나타내는 비유가 가능한 방안의 구조, 모든 삶이 그렇듯이 지나고 나면 그때가 좋았다고 말하더라만. 하긴 그렇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쁨의 날 오리니.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마음은 미래에 살고 모든 것은 순간이다. 그리고 지난 것은 모두 그리워지나니.”라고 푸쉬킨이 읊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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