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87- 누렁소가 팔려가던 날!

영광도서 0 479

요즘 집 값 상승으로 말들이 많다. 전에는 몰랐는데 들어보니 부자는 부자답다. 웬 집이 그리 여러 채를 소유하고 있는지, 그렇게 비싼 집이 있는지, 내가 같은 나라 같은 서울에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세금을 올린다느니, 아니 올랐다느니 말도 많다. 억울하긴 하다. 우리 전 재산이라곤 달랑 집 한 채인데, 가만있어도 값이 올랐으니 세금을 더 내는 것은 당연하다만, 수입은 오히려 줄어드는데 세금만 오르다니. 그렇다고 살던 집을 팔고 같은 규모의 집을 사려면 서울을 떠나, 수도권을 떠나야 할 판이니, 이런 건 세심하게 고려해주어야 할 듯하다.

 

전 재산, 집 한 채, 부동산 이건 그나마 사라지지 않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어렸을 적 시골에서 어쩌다 어렵사리 내 소 한 마리 갖는다면 그거야 말로 전 재산이었다. 아주 애지중지 길러야 했다. 그럼에도 그것만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여전히 일은 일대로 해야 했으니까.

 

봄에 파종기가 끝나면 암소들도 일이 없다. 그러면 어른들은 해 뜨기 전에 벌써 소를 적당한 풀밭에 데려다 매어 놓고 일터로 나간다. 밧줄을 어느 정도 길게 늘어놓고 말뚝이나 나무에 매어놓으면 소는 줄이 닿는 범위에서 풀을 뜯는다. 한나절 동안 소는 그곳에서 스스로 먹거리를 해결한다. 그런 좋은 풀밭이 많지는 않다. 때로는 조금은 여기 저기 나무들이 드문드문 선 곳에 매어 놓기도 한다.

 

아무 데나 소를 매어 놓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면서 가끔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매어놓아야 했다. 소도 성정이 각기 달라서 정말 순한 소는 풀밭에 데려다 놓고 밧줄을 매어 놓지 않고 서리서리 목에다 감아주어도 도망가지 않고 그곳에서 종일 풀을 뜯다가 누웠다가 하면서 하루는 보내는 소도 있긴 했다. 대부분의 소는 밧줄을 매 놓지 않으면 얼마 있다가 자리를 떴다. 아니 뜨려고 애를 썼다. 때문에 밧줄에 매어 두는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매어둘 풀밭이 없을 때는 평평한 곳에 말뚝을 박고 매어두고 풀을 베어다 주어야 했다.

 

소를 잘 보이는 곳에 매어 두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소들은 밧줄로 매어놓으면 풀을 뜯어 먹으려고 돌아다니다 나무에 밧줄이 감기면 그걸 스스로 풀지 못하고 빙빙 돌다가 밧줄에 걸려 넘어지거나, 풀밭이 좋아 밧줄이 감길 곳도 없음에도 제 발에 둘레둘레 감고 넘어지기도 한다. 소는 스스로 누웠다가는 얼마든 일서지만, 밧줄을 감고 넘어지면 다리가 땅에서 약간 들리긴 하지만 배가 무거워서인지 스스로 일어서지 못한다. 그대로 있으면 다행인데, 소는 그대로 오래 내버려두면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죽는다. 때문에 잘 감시해야 한다. 멀리서 봐도 서 있으면 보이지만, 누우면 안 보이기 때문에 그럴 때는 직접 가서 제대로 누웠는지, 밧줄을 발에 감고 누웠는지를 살펴서, 밧줄을 감고 넘어졌으면 얼른 감은 밧줄을 풀어준 다음 등을 밀어서 발이 땅에 닿게 해주어야 소는 일어선다.

 

그런 일을 대부분 아이들이 맡았다. 아이들이 학교에 있을 때는 어른들이 가끔 바라봐야 했으니 일을 하랴 소 바라보랴 신경이 쓰일 것은 당연했다. 어른들이 한나절 그렇게 일하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그 일은 아이들 몫이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기 바쁘게 매어둔 소에게 가서 잘 있는지 봐야 했고, 소가 있을 장소를 옮겨 주어야 했다. 이를 위해 아이들은 사전에 밧줄을 매는 방법이며 소를 끌고 다니는 방법을 숙지해야 했다. 안전한 곳을 찾지 못하면 소가 똥을 깔고 눕지 않을 만큼 조금만 옮겨주고 나무 사이사이에서 풀을 베어 소에게 갖다 주는 일이 아이들 몫이었다. 그렇게 소를 보살피며 저녁에 먹일 꼴을 베는 일 역시 아이들 몫이었다.

 

저녁이면 소의 밧줄을 풀고 집으로 왔다. 엄청나게 덩치가 큰 소에 비하면 아이들은 아주 작고 만만해 보일 테지만 소는 아이들 말을 잘 들었다. 앞에서 밧줄을 끌면 소가 만만하게 보고 냅다 도망치는 일도 있어서 소를 끌고 다닐 때는 소 뒤에서 밧줄을 잡고 이끌었다. 그러면 소는 코가 꿰어 꼼짝하지 못하고 저보다 아주 작은 아이의 말도 잘 들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순한 소는 밧줄을 풀어 등에다 얹어 주면 벌써 알아차리고 점잖은 걸음으로 집에까지 와서 자기 집인 외양간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전 재산인 소중한 소, 그런 소 한 마리 소유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아니 꿈 때문에 어른들은 열심히 일했지만 쉽지 않았다. 천신만고 끝에 그렇게 소 한 마리 소유하면, 우리 소라는 이름을 얻으면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무척 기뻤다. 그랬는데 간혹 그렇게 소중한 소가 죽는 경우가 있었다. 병들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풀밭에 매어놓았는데, 밧줄에 다리를 감고 넘어져 그대로 죽고 마는 경우가 있었다. 전 재산이 날아간 순간 그 일을 당한 집은 초상집보다 더 슬펐다. 그럴 때면 동네 어른들이 모두 나서 소 분해 작업을 했다. 큰 소 한 마리면 고기 량도 무척 많았다. 당사자는 실의에 빠져 아무것도 못했고 대신 동네 어른들이 부위별로 뚝뚝 떼어 사정이 되는 대로 집집마다 분배했다. 저울로 달아 가져간 만큼 적당히 가격을 매겨서 돈을 거두었다. 서로 어렵게 살았지만 그때는 없는 돈이라도 내어서 소고기를 가져와야 했다. 그렇게 피해를 입은 집을 최대한 도왔다.

 

그때에야 쇠고기 맛을 보긴 했다. 봄 내내 일을 하던 소, 풀만 먹고 사는 소라서 일 것이다. 소고기는 구워서 먹는 경우는 없었다. 무를 숭덩숭덩 썰어 넣은 무국으로 만들어 먹었다. 소고기는 끓이면 약간 검은 색으로 변했다. 너무 질긴 탓에 깍두기 중에서도 자잘한 깍두기만한 크기로 잘라서 끓였는데도 잘 씹히지 않을 만큼 질겼다. 이후 그런 소고기는 맛을 본 적이 없었다. 시골에선 어쩌다 한 번 그런 일이 일어나곤 했고 그때마다 어른들은 사고를 당한 집을 도왔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우리는 남의 소를 많이 길렀지만 사고를 당한 적은 없었다.

 

참 오랜만에 우리도 소를 가진 적이 있었다. 덩치는 컸지만 순했던 소, 나에겐 친구와 같은 소, 부모님껜 전 재산이었던 소, 아주 어렵게 남의 소 길러 구한 소였다. 그런데 그 소를 큰형 학비 때문에 팔아야 했다. 너무 마음이 아릴만큼 슬펐다. 나만 슬픈 게 아니었다. 고삐에 매여 외양간을 나서 낯선 이의 손길에 잡혀 끌려 나가는 우리 소, 말아소는 그날따라 더 커진 눈에 눈물을 그득 담은 채 힐끔힐끔 나를 돌아보았다. 슬 펐 다. 많이.

 

그날 그렁그렁하게 고였던 누렁이의 눈물이 오랜 세월이 지나고도 기억에 남는다. 우리 식구로 살았으나 돈 때문에 어디론가 팔려간 누렁이, 별 수 없이 영문도 모르고 보내야 했던 누렁 소, 늙어서 뿔이 까칠까칠했던 누렁 소, 아버지에겐 그냥 돈벌이였겠지만 나에겐 친구와 같은, 형제와 같았던 정든 누렁 소, 아직 그때 그렁그렁한 누렁이 눈물이 눈에 선하다. 아마도 평생 그럴 것 같다. 녀석은 분명 천국에서 풀을 뜰을 텐데, 나도 만일 천국에 가면 그 누렁 소의 그때 그 모습으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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