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90- “고양이는 밥값을 한다!”

영광도서 0 582

가끔 카페에서 다른 이들, 특히 아주머니들의 이야기를 훔쳐 듣다보면 애들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 애는 어떻고’하는 진지한 이야기, 무슨 이야기일까 궁금해서 엿듣는다. 그런데 이야기의 방향이 다소 의아해서 좀 더 듣노라면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사람 아기의 이야기가 아니라 개들의 이야기임을 그제야 알아차린다.

 

소위 반려동물의 시대이다. 개나 고양이를 동물로 여기지 않는다. 가족으로 여긴다. 사람으로 또는 사람 이상의 대우를 한다. 스스로 개의 엄마가 되거나 개의 아빠가 되고, 개의 언니가 되거나 개의 오빠가 되거나 한다. 개들이, 고양이들이 이전보다 훨씬 사랑을 받는다. 한편으로는 산이나 동네에서 버림받은 반려동물들을 많이 본다. 아이러니하다.

 

나 여렸을 적엔 반려동물이란 말 자체가 없었다. 개는 개요, 고양이는 고양이였다. 개는 밖에서 모든 생활을 했고 고양이는 방안에서 자고 밖에 나가 활동했다. 집집마다 고양이 없는 집이 없었다. 고양이는 개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았다. 평소에 개에 비해 고양이가 더 많은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고양이가 개보다 나은 대접을 받는, 적어도 방안에서 생활할 수 있는 이유는 깔끔함 덕분이었다. 개는 아무 데나 똥이나 오줌을 싸는 데 비해 고양이는 일정한 장소에서만 볼일을 보았다. 방안에 망가진 양동이에다 모래가 많이 섞인 흙을 담아 놓으면 고양이는 매번 실례를 그곳에만 했다. 그곳에 똥을 눕고는 발을 까작까작거려서 똥을 덮었다. 가끔 그 그릇만 비우거나 청소를 해주면 되었기 때문에 방을 더럽힐 염려가 없었다.

 

방에 당당하게 자리를 잡은 고양이는 특히 따뜻한 곳을 즐겼다. 따뜻한 아랫목 이불 밑이거나 사람이 누우면 품으로 파고들어서 그곳에 누워 잠을 즐겼다. 그렇게 파고들어 배에서 부르륵거리는 소리를 내는 녀석을 보면 참 귀여웠다. 그러다가 장난을 걸면 녀석은 사람과 손을 마주치는 것처럼 장난하기를 좋아했다.

 

고양이가 안방을 차지한 때문인지 고양이가 어쩌다 밖으로 나가면 개들은 고양이에게 달려들었다. 재빠른지라 개에게 잡히지는 않았지만 개와 고양이는 원수지간처럼 지냈다. 방안에서 생활하는 고양이에 대한 질투심이 개에게 있었을지 모르겠다. 때문에 고양이는 개를 무서워했고, 고양이는 개를 피해서 다녔다.

 

고양이가 개들보다 더 사랑 받은 이유는 또 있었다. 개는 나중에 팔려가면서 돈을 벌게 해주는 게 전부였다면, 고양이는 늘 일꾼이었다. 고양이는 곡식을 훔쳐가는 쥐를 잡는 첨병이었다. 무척이나 쥐를 잘 잡았다. 고양이가 쥐를 잘 잡게 하려면 먹을 것을 최소한만 주어야 했다. 배불리 먹도록 주면 고양이는 게을러서 쥐를 잡지 않았다. 조금은 배가 고프게 만들어 쥐를 잡게 했다. 그렇게 하여 쥐 사냥에 나선 고양이는 쥐를 잡았다. 쥐를 잡으면 그냥 먹지 않았다. 반드시 쥐를 잡아가지고 와서 보여주었다. 꼭 우리 아버지한테 보여주었다. 그제야 잡아온 쥐를 내주면 고양이는 쥐를 가지고 나가 높은 곳으로 물고 올라가 정찬을 즐겼다. 먹다가 남은 것은 마당에 떨구면 그제야 개들이 나머지를 먹었다. 고양이는 주인에게 자신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릴만큼 영리했다.

 

그런 습성이 때로 곤란하게 할 때도 있었다. 시골에서 살 때엔 방이 두 칸이었다. 아랫방과 윗방이었다. 저녁에 잠을 잘 때 아랫방에선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어린 동생들이 함께 잤고 좀 더 자란 작은형과 나 그리고 작은누나는 윗방에서 잤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을 때라 등잔불을 켤 때였다. 밤중에 갑자기 고양이가 야옹거렸다. 아버지가 등잔에 불을 켰다. 놀랍게도 그 밤에 고양이 녀석이 뱀을 잡아서 물고 들어온 거였다. 다 죽이지도 않고 물고 들어와서 앞발로 뱀의 뺨을 때리며 아버지에게 보라는 듯 뱀을 놀리고 있었다. 놀란 아버지는 얼른 뱀을 집어서 밖으로 내던졌다. 고양이는 밖으로 나갔다. 다시 그 뱀을 물고 들어와서 야옹거렸다. 아보지가 고양이를 야단치며 다시 마당으로 내던졌다. 잠시 후 고양이는 다시 물고 들어왔다. 그렇게 고양이와 아버지는 세 번에 걸쳐 씨름을 해야 했다. 그 다음에야 고양이는 뱀을 물고 들어오지 않았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위해 최대한 용기를 내서 뱀을 내던졌을 터였다. 고양이는 자신이 일을 제대로 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뱀을 물고 들어왔을 터였다. 그만큼 고양이는 개에 비해 영리하다면 영리했고, 밥값을 충분히 하는 덕분에 안방의 주인일 수 있었다. 고양이 한 마리만 있으면 집 주변에서 쥐를 볼 수 없었다. 어떻게든 쥐를 잡아내는 데는 일가견이 있어서 고양이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기보다 대접을 받았다.

 

그런 목적으로 어른들은 고양이를 길렀다면, 나는 고양이와 노는 것을 즐겼다. 누워 있으면 품으로 파고들어 부르룩 거리면서 안겨 있는 녀석을 보면 귀여웠다. 이 집이든 저 집이든 고양이 생김새는 모두 같았다. 검은 털에 목에 흰 테를 두르고 배 부분은 흰 고양이 그런 종류밖에 없었다. 방안에서는 고양이는 잘 따랐지만 밖으로 나가면 고양이는 따라오지 않았다. 밖에 나오면 개들이 따랐다.

 

개든 고양이든 반려동물로 생각한 적이 전혀 없었던 시대, 개는 개였고, 고양이는 고양이, 사람은 사람이었다. 때가 되면 개는 팔려갔고 때가 되면 고양이는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때로 정이 들어서 팔려가는 개를 보면 슬펐지만 반려견은 아니었고, 더 이상 쥐를 잡지 못하고 늙으면 어디론가 슬그머니 사라진 고양이는 그냥 잊었다. 그러니 반려양이는 아니었다.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사랑을 줄 때는 반려동물이라 하여 담뿍 사랑을 주지만 어느 순간 사정없이 유기 시켜 버리는 요즘, 어느 쪽이 바람직한지는 모르겠다. 어쩌다 북한산이나 도봉산에 오르면서 만나는 유기견들과 유기 고양이들, 그들의 측은한 눈빛을 보면 안쓰럽다. 주 한 마리 잡을 줄 몰라 사람만 보면 따라와서 먹을 게 없나 주변을 서성거리는 고양이를 보면 품에서 부루룩거리다 반드시 제 할 일이라고 쥐를 잡으러 나서던 그 옛날 고양이와 비교되어 무엇이 바람직한지 나마저 헷갈린다. 그때의 고양이가 그립다는 상투적인 말은 안하련다. 고양이는 고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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