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01- 궁함에서 얻는 엄마표 음식들

영광도서 0 569

‘궁하면 통한다’는 말처럼 뭔가 고픈 게 있어야 궁리를 하고, 궁리하면 답을 얻는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보다 노가 진화한 까닭은 다른 동물에 비해 궁한 것이 많아서였으리라. 사람이라도 궁하지 않으면, 스스로 궁한 것이 없다 여기면 발전하지 못한다. 뭔가 궁하다, 달리 살고 싶다, 다른 것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을 때 행동하거나 실천하다 보면 나름의 해결책을 얻으니, 궁함이 주는 선물이다.

 

지금 생각하면 내 엄마는 무척이나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사랑이 많은 요리법을 생각해 내셨던 듯싶다. 우리의 주식은 고작 감자, 옥수수, 메밀, 콩이나 팥이 전부였다. 그 중에서 땟거리를 위해선 감자와 옥수수였다. 메일은 어쩌다 한 번 별식 만들 때 썼고, 콩이나 팥은 밥을 하거나 떡 만들 때 넣는 정도였다. 엄마는 단순한 식재료로 다양한 음식을 만드셨다.

 

감자로는 그냥 찐 감자, 쪄서 다진 감자, 밥에 넣은 감자, 구운 감자, 썩은 감자떡, 당시엔 누구나 이 정도로 감자를 주식으로 삼아 다양하게 먹었다. 물론 썩거나 해를 봐서 아린 감자는 그냥 먹을 수 없어서 떡을 하려면 일단 썩혀야 하고, 썩힌 다음 물갈이를 오래 하여 냄새를 지워야 하고, 완전히 썩어 가루가 되면 걸러내야 하고, 걸러낸 다음 잘 말려야 하기 때문에 손이 많이 가야 했음으로 하지 않는 집들도 더러 있었지만, 지독하게 가난했던 우리는, 아니 내 엄마는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아 감자떡 거리를 준비해두셨다가 가끔 떡을 만드셨다. 그 안에 고물로 콩이나 팥을 넣었다. 진짜 감자가로만 넣은 떡은 따뜻할 때 먹어야 말랑하지 조금만 식으면 딱딱해서 먹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엄마표 감자장아찌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엄마만 만드셨는데 무척 쫄깃한 것이 맛이 있었다. 게다가 감자를 캐고 나면 너무 잘아서 까 먹을 수도 없는 콩알보다 조금씩 큰 감자알들도 모아서 조림을 만드셨는데 한 입에 쏙쏙 들어나 별미였다. 옥수수는 먹을 것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풋옥수수를 삶아 먹거나 풋옥수수를 알알아 따서 팥이랑 섞어 삶아 먹거나 했다. 그 외에 올챙이묵을 만들어 먹거나 칡 반대기를 만들어 먹었다.

 

삶은 풋옥수수야 누구나 일상처럼 먹다시피 했지만 칡 반대기는 어쩌다 한 번 해 먹었다. 일단 풋옥수수를 일일이 따서 맷돌에 갈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랐다. 풋옥수수는 갈 때 약간의 물을 부으면서 갈면 그대로 반죽이 가능했다. 그렇게 좀 질은 반죽을 널찍한 칡잎을 따다가 칡잎에 싸서 찌면 칡 반대기였고, 옥수수 속껍질로 싸면 옥수수섶 반대기였으나 일반적으로 칡잎을 이용했으므로 칡떡이라 했다.

 

조금 더 옥수수가 익어 풋옥수수를 넘어서면 올챙이묵을 해 먹었다. 옥수수국수를 한답시고 옥수수를 갈아서 물기가 아주 많은 묽은 가루로 만든 다음, 구멍 숭숭 뚫린 큰 깡통에 담아서 통에 들어가기에 딱 맞게 준비한 나무판으로 누르면, 구멍을 빠져나간 옥수수 가루들은 끈기가 없어 올챙이모양으로 뚝뚝 떨어졌다. 밑에 펄펄 끓는 무쇠솥 물에 떨어지면 금방 익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누르시고 엄마는 금세 건져내면 되었다. 그게 올챙이묵이었다. 그렇게 준비한 올챙이묵은 별다른 방법이 없이 그릇에 올챙이묵을 담고 찬물에 간장을 타서 먹으면 끝이었다.

 

완전히 마른 옥수수로도 올챙이묵은 가능했으나 풋옥수수로 만든 올챙이묵만큼은 맛이 적었다. 해서 이때부터 완전히 마른 옥수수는 주로 밥을 해 먹었다. 옥수수밥은 마른 옥수수를 맷돌에 갈아서 해야 했다. 맷돌에 마른 옥수수를 타개면 여러 쪽으로 갈라져서 마치 싸라기모양이긴 하나 싸라기보다 조금 굵었다. 그걸로 밥을 하는 거였다. 그렇게 만든 옥수수쌀로 지은 밥은 무척 딱딱했다. 그래서 가끔 옥수수밥에 감자를 섞어 밥을 짓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식으면 숟가락이 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먹기 힘들었다. 물에 말아 먹어야 했다. 밤이면 엄마와 아버지는 거의 매일 옥수수를 갈아서 밥거리를 준비하셔야 했다. 명절이면 맛은 없지만 찰옥수수로 떡을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옥수수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국수를 만들려면 우선 옥수수를 디딜방아로 찧어 가루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려면 바짝 말려야 했다. 그런데 옥수수는 끈기가 없어서 고작 올챙이묵밖에 만들 수 없어서 국수를 만들려면 느릅나무뿌리를 준비해야 했다. 느릅나무뿌리는 아주 끈적끈적했다. 뿌리를 캐어 잘라서 껍질을 벗기면 깝질은 잘 벗겨졌다. 껍질을 벗기고 나면 하얀 가는 초리만 남았다. 그렇게 벗겨낸 껍질을 일일이 작두로 잘게 잘라서 말린 다음 역시 디딜방아로 가루를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가루와 옥수수가루를 섞어 반죽을 하면 옥수수는 끈기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 집엔 이웃집에서 이사를 가면서 주고 간 국수틀이 있어서 별식으로 만들어 먹곤 했다. 대부분 국수틀이 컸으나 우리가 얻은 국수틀은 아주 작았다. 전체 길이는 2미터가 채 안 되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부엉이방귀를 뀌었다는 툭 튀어나온 나무에 구멍을 뚫어서 만든 것이었다. 그것을 틀로 하여 부엉이방귀 확에다 공이를 넣어 누를 수 있는 틀이었다. 이 틀에다 준비한 반죽을 넣고 누르면 누런 국숫발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고, 밑에서 펄펄 끓는 무쇠솥 물에 담겼다. 아버지는 국수를 누르셨고, 엄마는 솥에 떨어진 국숫발이 엉키지 않게 큰 조리로 휘휘 저은 다음 익었다 싶으면 건지셨다. 그렇게 건진 국숫발은 누릅나무껍질 가루 덕분에 끈기를 얻었고, 누런색을 띠었다. 그렇게 만든 국수는 시원한 오이 냉국이나 김칫국물에 담아 먹으면 맛이 그만이었다.

 

메밀로는 메밀전, 메밀전병, 메밀묵을 해 먹었는데, 여기에 엄마표는 따로 없었던 것 같다. 비록 식자재는 다양하지 않았으나 엄마는 어려 음식을 만들 줄 아는 재주가 있으셨던 듯싶다. 같은 음식만을 반복해 먹이려니 마음이 안 되어서 이런 저런 시도를 하셨던 듯싶다. 소박한 엄마의 사랑이 여러 음식을 궁리한 것이 아닐까 싶다. 엄마의 사랑, 밥맛이 덜한 요즘 엄마의 다양한 음식을 떠올리면서 엄마의 마음을 다시 헤아린다. 자식을 사랑하는 궁한 마음으로 빚은 음식들, 궁한 마음은 사랑에서 나오고, 이 사랑은 창의적인 생각을 낳는다는 생각을 하니 평생 무엇에든 궁한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교훈을 엄마의 그리움과 함께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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