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23- 언덕 위에 하얀 예배당의 수채화

영광도서 0 520

요즘 코로나19로 많은 사람들이 우울해하고 답답해한다. 마치 묵직한 분위기 감도는 감옥에 갇혀 감옥살이를 하는 기분이랄까, 점차 지쳐간다. 감옥이 아니라면 끝을 알 수 없는 터널을 통과하는 기분, 그런데 끝이 어딘지 모르는 컴컴한 어둠 속 터널을 걷는 기분이다. 보일 듯 보일 듯 보이지 않는 터널 끝, 어쩌다 빛 한 줄기 들어오면 끝인가 하여 가 보면 작은 구멍이 생겨 새어 들어온 빛일 뿐, 다시 굽이 돌아서면 끝이 안 보이는 그런 기분, 매일이 희망고문으로 보낸다. 그런 와중에 누구 탓인지 논란이 오가면서 그 중심에 종교문제도 떠오른다.

 

그렇다고 이 아침에 정치를 논하고 종교를 논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건 똑똑한 사람들이나 하든, 그런 사람들끼리 하면 될 일이다. 다만 정치든 종교든 꼭 필요하다는 믿음을 나는 갖고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욕심으로 자기 삶을 살려하면 그걸 조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 제대로 자리 잡고 살도록 조정을 누가 하랴. 그래서 정치가 필요한 것일 터. 아무리 애써도 인간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얼마나 많은가. 그 문제들을 누가 대신하누. 그러니 그럴 때 의지할 이, 의지하고 싶은 이를 마음에 두고 살면 그나마 위한이 되지 않으랴. 그래서 신이 필요하고, 종교가 필요한 게지. 분명 정치도 종교도 긍정적인 면이 있다만, 이를 이용하는 무리들이 있어서 문제 아니던가.

 

이런 세상 저런 세상, 좀 영악하게는 살아야 할 것 같다. 선한 얼굴로 살되 속으로는 약삭빠르게 내 욕심을 채우는 법을 배워야겠다. 그러면 남들이 볼 때, ‘저 사람은 참 좋은 사람이야.’ 라면 내 속도 모르고 칭찬할 테니까. 이런 나를 순수하다고 하는 거다. 정말 몰라서 선하면 순진이요, 알 건 알지만 남에게 선하게 보이면 그게 순수이다. 나? 때로는 순진한 면 참 많다. 부끄러울 정도로, 때로는 순수하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순수하지는 않다. 나는 영악하다.

 

분명한 건 순수하지는 않고 온전히 순진한 때가 있었다. 어릴 때, 초등학교에 다닐 때이거나 그렇지 않을 더 어릴 때였다. 아주 순진하게 교회에 다녔다. 소위 천주교는 없었지만, 천주교에서 구호품을 나누어 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천주교는 볼 수 없었다. 대신 우리 마을에 감리교회가 있었다. 면소재지에게 까마득한 오르막을 올라서면 우람하고 성스러운 서낭나무가 지켜선 가족고개를 넘어서, 1킬로미터쯤 내려가다 오른쪽 언덕 위에 교회가 있었다. 목재로 지은 교회였다. 바닥은 마룻바닥이었지만, 동네에선 제일 큰 건물이었다. 방석 하나씩 깔고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교회였다.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가면 자기 자리가 저절로 정해져 있었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들어가면서 왼쪽엔 남자들만 앉았고, 오른쪽엔 여자들만 앉았다. 순진했든 순수했든 남자들과 여자들의 자리 한가운데 과장하면 삼팔선만큼이나 남녀의 경계선이 그어진 듯 떨어져 앉았다.

 

시계도 가진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적당히 때에 따라 예배를 드렸다. 올 사람이 거의 와야 예배를 드렸다. 때를 알리는 건 종소리였다. 교회마당을 둘러선 커다란 낙엽송이 나란히 섰는데, 적당한 높이에 나무 막대를 건너질러 그 막대기에 산소통을 매달았으니 그게 종이었다. 누구든 교회에 일찍 간 사람이 날이 무딘 도끼 등으로 종을 쳤다. 종소리는 마을을 건너고 산을 넘으며 골짜기마다 울려 퍼졌는데 은은한 소리가 듣기에 좋았다. 마치 “천당, 천당” 종이 말하는 듯한 소리였다. 그 소리가 참 좋았다.

 

엄마를 따라 교회에 다닌 게 교회와의 인연, 신과의 인연이었다. 다니면 좋았다. 크리스마스 때면 교회에서 과자도 주었다. 재미있는 볼거리도 교회 청년들이 보여주었다. 텔레비전도 없고, 라디오도 없는 동네에서 서툴렀겠지만 청년들이 부르는 찬양이며, 연극은 짭짤한 재미를 주어, 크리스마스는 온 동네가 축제와 같았다. 믿는 이나 믿지 않는 이나 함께 교회에 모여 그걸 즐겼다.

 

크리스마스이브엔 교회 청년들이 믿는 집이건 아니건 동네를 돌면서 집집마다 그 집 앞에서 찬송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불렀다. 어느 집이건 먹을거리나 선물을 내주었다. 옥수수엿이며, 강냉이며, 과자며, 어느 집이건 믿음과 상관없이 교회청년들이 지고 간 자루에 그걸 담아주었고, 아이들도 포함된 청년들은 축복을 빌어주었다. 하얀 눈이 쌓인 신작로를 따라가다가 작은 소로를 따라 흰 자루를 짊어진 청년이 앞서고 그 뒤를 순수한 청년들과 순진한 청년들, 아주 순진한 아이들이 그렇게 크리스마스 새벽을 열었다.

 

크리스마스 날엔 신자가 아닌 동네 사람들도 예배에 많이 참석했다. 그날은 모두들에게 교회에서 먹을거리는 나누어주었으니까. 저녁엔 앞에서 말한 대로 청년들이 주도해서 꾸민 아이들의 재능발표, 청년들의 연극이 이어졌다. 이 날을 기회로 교회에 다니는 신도들이 늘기도 했다. 믿거나 믿지 않거나 그 날만큼은 온 동네 사람들 모두 교인이었다.

 

나중에 목재건물을 블록으로 지을 때, 나도 주도적으로 건축에 참여했다. 소위 노가다로 봉사를 했다. 지금도 그때 지은 블록 건물이 있을 듯싶다만.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는 참 순진했던 듯싶다. 청년이 되어서도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었다. 스물네 살까지 농사를 지었으니, 그때에도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님이 지켜보신다 믿으면서 종소리가 들려주는 ‘천당’이란 외침에 부끄럽지 않도록 살았으니, 그때 죽었으면 난 여지없이 천국에 들어가고도 남았다. 그때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었다고 자신한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자를 무리가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했을 때, 예수께서 “여러분 중에 죄 없는 분들부터 돌로 치세요.”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무도 돌로 치지 못했듯이 지금의 나 역시 그러 무리 중에 일부일 뿐이다. 그럼에도 마음에 종교를 심고 있으면 최소한의 양심은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가끔은 회개의 마음을 품고 사니까. 누군가 나의 언행을 지켜보신다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계신다는 믿음이 나를 완전히 버리게 만들지는 않으니까, 그런 점에서 종교는 필요하리라. 적어도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종교인 행세는 하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만 있다면 좋겠다. 거짓 선지자가 많으니, 이제는 순진하여 좋은 신도가 아니라, 순수하여 자신을 지킬 줄 아는 신도, 알 건 다 알면서 믿기에 거짓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 순수한 신도로 살아야겠다. 그나마 내가 그런 대로 괜찮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 마음의 힘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있으니까.

 

가끔은 아주 순진했던 시절,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저녁 무렵 울려 퍼지는 산소통 울림소리가 “천당, 천당”으로 들리던 그 시절로. 눈 쌓인 날 언덕 위에 하얀 예배당, 지금 내 마음에 수채화로 그려진다. 은은한 종소리도 들린다. “천당! 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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