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33- 검정고무신을 잃어버린 날

영광도서 0 565

어려선 제일 무서운 사람은 엄마, 나이 들면 제일 무서운 사람은 아내, 늙으면 제일 무서운 사람은 딸이다. 때문에 역으로 남자는 평생 세 여자의 말만 잘 들으면 그런 대로 잘 살 수 있다, 그러니 어려선 엄마 말 잘 듣고 나이 들어선 아내 말 잘 듣고, 늙어선 딸의 말 잘 들으란 말이 회자되나 싶다. 나 역시 어려선 엄마가 제일 무서웠다. 지금은 아내가 제일 무섭다. 나중엔 딸이 제일 무섭겠지. 물론 엄마 말 나는 잘 들었다. 아내 말 잘 듣는 셈이다. 하지만 몰래는 그렇지 않을 때가 더러 있는 건 사실이다. 말 잘 들어야 하는데, 선생님 말은 무조건 잘 들어야 하는데.

 

아주 먼 옛날이야기 같지만 그렇게 멀지도 않은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내가 스물네 살 때까지는 일상적으로 검정고무신을 신었다. 특별한 날에만 구두를 신었고, 산에 갈 때만 농구화를 신었다. 그 중 열일곱 살 때까지는 항상 검정고무신을 신거나 아예 신을 신지 않고 다녔다. 밭일하거나 논일 할 때에는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로 일을 했으니까.

 

아직도 눈에 선한 검정고무신, 타이어가 신발 바닥에 그려진 진짜 타이어표, 말이 그려진 말표 그리고 그림이 생각나지 않는 왕자표 신발 세 가지였다. 검정고무신은 잘만 신으면, 다시 말해 길을 잘 들이면 아주 질겼다. 한 켤레면 족히 일 년은 신었다. 일 년쯤 거의 신을 참이면 바닥이 닳고 닳아서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간질간질했다. 그러다 끝내 바닥 한가운데가 닳아 없어졌다. 그렇게 바닥으로 물이 새는 것은 진즉이고, 흙이 저절로 들어오면 그제야 신발은 버림을 받았다. 이 경우는 아주 잘 길들여서 잘 신은 경우였다.

 

그렇지 않고 고무신은 새 신발일수록 자칫하면 잘 찢어졌다. 나무그루터기나 날카로운 무엇에 슬쩍 스치기만 해도 북 찢어졌다. 새 신발인데 그렇게 어느 한 곳이 찢어지면 그대로 버릴 수는 없었다. 그곳을 실로 엮다시피 하여 꿰매어 신었다. 어렸을 적엔 엄마가 꿰매주곤 하셨는데 그때는 검정 실도 없었는지 흰 실로 꿰매셨다. 검정고무신에 한쪽 귀퉁이가 흰 실은 영 모양이 우스웠다. 나름 잉크로 흰 실을 칠하여 신었다. 그러나 비에 젖거나 물에 한두 번 씻으면 다시 하얀 실로 바뀌었다. 그렇게 꿰매기를 수십 번 하면서 일 년을 버텨야 새 신발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초등학교 졸업 후에는 본드를 구할 수 있었다. 닳고 닳은 신발을 버리지 않고 두었다가 일부분을 오려 찢어진 부분에 본드로 덧붙여 신곤 했는데, 본드 질이 안 좋았는지 얼마 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실로 꿰매는 것보다는 보기엔 훨씬 좋았다.

 

이렇게 필수품이면서 귀했던 검정고무신을 잃어버린 일이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려면 강을 건너 신작로로 6킬로미터는 걸어야 했는데, 학교에서 신작로로 가려면 좌측으로 나 있는 정문으로 나가서 북쪽으로 더 올라가다가 좁고 높은 다리를 건너야 했다. 그러면 거의 200여 미터는 더 도는 셈이었다. 좀 더 가까이 가려면 우측의 소로로 나가 조금 내려가면 강을 따라 나 있는 소로로 가다가 징검다리를 건너야 했다. 그런데 이 징검다리는 평소에는 건너는 데 하등 문제가 없었지만 비가 좀 오면 물이 넘쳐서 건널 수 없었다. 그럴 때면 유속이 완만한 곳에서 아래로 내려가면서 건너야 했다. 무사히 건너면 바로 신작로를 만날 수 있었다. 이곳으로 건너려면 돌다리보다 위쪽에서 유속이 완만한 곳을 찾으면서 아래쪽으로 건너서 맞은편 돌다리 시작점으로 건너면 되었다. 혹여 떠내려가기는 해도 물에 빠져 죽을 만큼의 깊이는 안 되었으나, 자칫 더 떠내려가면 유속이 급격히 빠른 곳으로 이어지고 곧 물이 아주 깊으면서 소용돌이치는 소에 까지 떠내려갈 수 있었다. 그러면 곧 죽음이었다. 그것만 주의하면 되었다.

 

한 번은 비가 꽤 많이 와서 물이 불었다. 학교에서도 위험하니 다리로 건너라면서 모두들 일찍 귀가를 시켰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에서 집에 까지 가려면 여러 번 개울을 건너야 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옆집 선배와 함께 그 강을 건너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집에 가려고 다리로 건너지 않고 강을 건널 작정이었다.

 

이미 돌다리로는 건널 수가 없었다. 돌다리가 넘치면 돌다리 부근으로는 건널 수 없었다. 돌다리를 놓은 곳은 유속이 비교적 빠른 곳이 더러 있음에도 가로지르기 좋아 놓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돌다리보다 위쪽에서 시작하여 비교적 유속이 느린 곳을 택하여 건너는 게 가끔 하던 일이었다. 책보는 전대처럼 가로질러 어깨에 메었다. 검정고무신은 벗어서 한 손으로 움켜쥐고 물에 닿지 않게 머리 위로 올리고 서서히 아래쪽으로 물의 흐름을 따라 아래쪽으로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20여 미터의 강폭, 완만하게 건너려면 3-40미터의 거리, 그 중에서 6-7미터만 더 건너면 끝날 즈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흙물이 역류하고 있었다. 위에서 내려가는 중인데 물이 아래로 흘러야 정상인데 오히려 거꾸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잠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나는 물 위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문제는 검정고무신 한 짝이 나보다 앞서 떠내려가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난 나는 허우적거리며 그것을 애써 잡았다. 그런데 이번엔 한 짝을 잡는 대신 다른 한 짝을 놓쳤고, 그 놈은 유유히 내 눈에서 사라졌다. 다행히 유속이 빠른 곳 5미터 전쯤에서 강을 건너는 데는 성공했으나 검정고무신 한 짝을 잃고 말았다. 그 다음 날 아버지랑 가서 찾고 찾았지만 끝내 신발을 찾을 수 없었다. 때문에 다음 장날까지는 할 수 없이 맨발로 걷다가 학교 들어갈 쯤에서 아버지 신발을 질질 끓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했는데, 옆집 선배 말을 들었다가 고무신 한 짝을 잃었으니, 자칫하면 죽을 뻔했으니, 엄마, 아내, 딸의 말보다 선생님 말씀은 정말 잘 들어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어려선 엄마 말씀 잘 듣고, 학교에 가면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장가들면 아내 말 잘 듣고 늙어선 딸의 말 잘 들어야 하는 게 맞을 거다. 물론 나 역시 말은 잘 듣는 편이었다. 지금? 아내가 제일 무섭다. 말도 잘 듣는다. 때로는 몰래 위험한 산에도 간다만, 아직도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다는 아내의 말을 듣는 걸 보면 내가 모험을 좋아하긴 하나 보다. 그 버릇은 고치기 힘든 것 같기도 하다. 그때 일은 지금도 생생하다. 흙탕물이 보인다. 나를 향해 물이 거슬러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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