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은근한 연꽃향을 훔쳐가는 바람처럼
연꽃이 좋습니다. 요란하지 않으나 은은한 소리, 화려하지 않으나 은근한 끌림, 진하지 않으나 은근한 향, 한겨울에 웬 연꽃 타령이냐고요. 연말이라선가요, 연꽃의 매력이 새삼 떠오릅니다. 요란하지 않으며 아름답고, 진하지 않으며 은은한 향이 있어서, 은근히 끌어들이는 매력, 은근히 눈을 유혹하는 매력, 은근히 마음을 끌어들여 바쁜 마음 멈추게 하는 매력을 느끼게 하는 연꽃, 연꽃의 매력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연꽃이 바로 수필의 정신인 때문입니다. 소설처럼 역동적인 재미, 쥐락펴락 사건이 일어나고 해결하거나, 꼬이고 풀리거나, 썸을 타고 감동을 주거나 하는 재미는 없으나 수필은 은근한 재미를 줍니다. 시처럼 '아'하는 퍼뜩 떠오르는 의미나 깨달음을 주는 간략하며 강한, 겉과는 다른 뜻을 이면에 감추지는 않으나 은근한 울림으로 깨달음을 주는 것이 수필의 정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필은 연꽃을 그대로 닮았습니다.
연꽃 그리고 수필 이야기를 새삼 왜 하느냐고요? 도봉문화원에서 수필 선생을 한 지가 만 5년입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나에게 수필을 배우는 이들의 글을 모아 문집을 냅니다. 이 분들의 글 전체를 읽고 편집하여 책을 완성합니다. 일 년 간의 결실이라면 결실입니다. 매주 월요일이면 즐거운 마음으로 오는 이들, 그리고 뿌듯한 표정으로 돌아가는 이들, 그 시간들의 결실을 읽으며 은근한 미소가 내 얼굴에 피어납니다. 그만큼 보람을 느낀다는 의미입니다. 처음과는 달리, 시작과는 달리 수필이란 문학의 도구로 자신의 삶을 곱게 표현하는 글들이 내 마음을 은근히 적셔줍니다.
지난주에 문집 <은근한 연꽃향을 몰래 훔쳐가는 바람처럼>으로 정식 출판을 했습니다. 올해는 판매용으로 제작했습니다. 조촐하니 출판 기념회를 하고 각자 책을 받아들고 돌아가는 이들, 마치 방학책을 받아 돌아가던 옛국민학교 시절의 어린 학생들의 그 마음을 훔쳐보는 느낌이었습니다. 문집 치고는 고급스럽다고 할까, 책 답다고 할까, 만면의 미소를 머금고 책을 받아 돌아가는 어른들을 보노라니 한편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그러고 나서도 단톡방에 올라온 글들에는 은근한 기쁨과 뿌듯함이 배어 있었습니다. 처음 교과서를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온 초등학생처럼.
매주 월요일이면 도봉문화원에서 수필 강의를 합니다. 일 년 48주, 거의 쉬는 월요일이 없습니다. 벌써 만 오 년입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만 거의 1000시간을 강의한 셈입니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오고 갔습니다. 물론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오는 이들도 있습니다. 처음에 왔을 때는 내가 떠돌이 같았으나 지금은 내가 터줏대감 같습니다. 덕분에 어느 곳보다 강의를 하는 데 불편하지 않고 부담 없으며 편안합니다. 이제는 고유의 분위기가 있습니다. 새로온 이들 역시 그 분위기에 젖습니다.
은근하며 은은한 연꽃과 같은 분위기가 우리 수필반에 감돕니다. 한 분 한 분 모두 좋습니다. 왕년에는 학교의 선생이었으며, 한가락하는 예술가였으며, 나름 멋지게 젊음을 살아온 이들이었던 이들, 연세 드신 이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수필반에 오면 하나 같이 순수한 학생입니다. 때문에 존경스러운 분들이 많습니다. 참 겸손한 분, 모두 좋은 분들입니다. 만나면 반갑고 헤어지면 아쉬울 만큼 한 분 한 분 모두 친절하고 겸손합니다. 수필을 가르치는 대신 나는 이 분들에게서 진정한 인생을 배웁니다. 진지한 삶의 태도를 배웁니다. 사람을 대하는 은근한 아름다운 배려를 배웁니다.
나는 가르치는 게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배웁니다. 지금은 선생으로 있지만 언젠가 이 자리를 내려갈 때면 나도 수강생으로 열심히 강의 듣고 글 쓰며 살아야겠다는 미래의 나를 그려봅니다. 나이들어서도 글을 쓴다는 것, 문학을 이야기하고 문우들을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어요. 배움에는 늦은 때란 없습니다. 지금 배우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지금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요. 내게 가르침보다 배우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가르쳐주는 이들, 나는 이들을 연꽃이라 부릅니다.
세상의 잡다한 문제를 세상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고, 나 자신의 문제로 끌어들여 나의 삶의 이야기로 쓰는 수필, 딱 수필의 정신을 닮은 이들, 이제 다음 다음 주면 새로운 마음으로 그 분들을 만날 겁니다. 매주 월요일이면 그 분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수필을 배우러 옵니다. 나 역시 즐거운 마음으로 그 분들의 삶을 배우러 갑니다. 은은한 향이 나는 그 분들의 삶의 향기, 은근하게 조곤조곤 삶을 이야기하는 수필, 삶의 연꽃 향이 어우러지는 도봉 수필반, 오늘은 맘껏 자랑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