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지리산, 고생을 사서 하는 이유
어제는 그제와 같다면, 오늘은 어제와 같다면, 그날이 그날이고 저날이 저날처럼 늘 같다면, 전혀 긴장이 없을 겁니다. 그러면 마음이 편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 그날들이 길어지면, 그래서 긴장이 없는 날들이 지속된다면 사람은 권태에 빠질 겁니다. 그러니 너무 이완된 삶을 살아도, 너무 긴장된 삶을 살아도 탈이 나는 게 인간입니다. 때문에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금언이 있지 싶습니다. 어느 정도의 고생, 조금은 힘겨운 어떤 일, 이마에 맺는 땀방울들이 마음에 위로를 주는 것도 인간이니 때문이 아닐까요?
인간이 나는 오늘 길을 나섭니다. 노고단대피소를 나섭니다. 아무도 없는 깊은 지리산을 혼자서 걷습니다. 대피소에서 나오면 이내 조금은 가파른 너덜길, 그 길 위를 걷는 나홀로 나그네입니다. 등 뒤로 교교한 달빛이 고독한 듯한 그림자를 하얀 눈에 그려냅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기장해 보면 이 겨울에 무얼 먹고 살겠다고 나선 들쥐인 듯 풀섶 그림자 속으로 재빠르게 숨습니다. 달빛이 그려주는 그림자를 질질 끌면서 발걸음은 경쾌하게 노고단 고개에 올라섭니다. 뒤로 돌아 하늘을 봅니다. 저만치 서쪽으로 좀 기운 달이 여전히 맑고 아름답습니다. 너무 맑아서 카메라에 담아봅니다.
숨고르기를 슬쩍 하고, 본격적인 산행을 위해 넓직한 고개에서 좁은 길로 접어들려 합니다. 지난해보다 사십 분 늦은 다섯시 반입니다. 그런데 그, 길 옆 통제소의 문이 갑자기 열립니다. 그 시간에 근무자가 그 안에 있을 줄 몰랐다가 놀랍니다. 그 분이 창을 엽니다. 먼 길 가느냐 묻습니다. 종주하려 한다고 하자 조심 또 조심하라며 보내줍니다. 달밤이라, 모자를 눌러 쓴 덕에 아마도 팔팔한 사람이라 보았을 겁니다. 그럼에도 혼자의 산행을 염려했나 싶습니다. 본격적인 산행 시작을 하는 듯이 속도를 내어 걷습니다. 겨울이 아니라면 너덜지대일 텐데 하얀 눈이 잘 다져져서 그냥 하얀 길을 걷는 듯 오히려 편합니다.
여러 번 다닌 길이지만, 아무도 없는 길을 걸으려면, 인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면 조금은 무섭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특히 야행성이라는 멧돼지가 등장할까 겁납니다. 그놈과 맞닥뜨리면 그놈과는 달리 협상할 수 없으니까요. 이렇게 살짝 긴장을 하면서, 스틱으로 일부러 소리를 내면서 용기를 냅니다. 하얀 바닥을 도화자 심아 숲의 나뭇가지들이 그려내는 동양호를 감상하며, 때로는 그 나뭇가지들의 그림자에 놀라기도 하면서, 뒤에 달린 모자가 세찬 바람에 팔그락거리는 소리에 흠칫 나 아닌 다른 존재의 등장인가 놀라기도 하면서 아직 팔팔한 힘찬 걸음으로 바지런을 떨다보면 임결령 샘입니다.
가던 길 잠시 미루고 좌로 조금 내려가 샘가에 멎습니다. 여름엔 그렇게 콸콸 소리를 내며 나오던 샘이 지금은 줄기가 애련합니다. 수량을 그래도 충분한 샘입니다. 샘물을 떠서 달의 정기를 담아 목 안으로 붓습니다. 상큼함이 목줄기를 타고 내려가면서 마음마저 상큼하게 바꿔줍니다. 그리곤 다시 길을 갑니다. 이제부터 오르막입니다. 보폭을 줄이고 속도를 늦춥니다. 속도조절을 하면서 걸어야 오후에도 덜 힘들게 걸을 수 있다는 걸, 오랜 경험을 통해 알기 때문입니다. 오르막을 올라 숨고르기를 하면서 걷다가 다시 오르막, 거기가 노루목입니다. 반야봉으로 가는 길과 종주능선으로 갈리는 길, 반야봉으로 오르는 길을 눈으로 슬쩍 훔치고 반야봉 올랐던 일들을 기억합니다. 추억어린 그 길을 두고 가던 길을 갑니다.
조금은 굴곡 심한 너덜길을 스틱으로 균형을 잡으며 걷습니다. 그러고 나면 반야봉에서 내려오는 길과 다시 합류, 거기서 조금 더 가면 삼도봉입니다. 삼도봉 전에 내리막길가엔 누구의 무덤인가 봉긋한 무덤이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지금은 하얀 이불을 덮고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그 무덤을 지나서 다시 오르막을 조금 더 오르면 그곳이 삼도봉입니다. 뾰족한 삼각뿔, 달빛 쪽으로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달빛 반대쪽으로 경상남도, 삼각뿔에 갇도를 맞추고 카메라에 달을 담아냅니다. 잠시 사방을 둘러봅니다. 아무 존재도 없습니다. 삼도봉 아래로 산그림자들이 어린 풍경들을 카메라에 담으려해도 시커면 어둠만 화면에 가득합니다.
삼도봉을 떠나 급경사 내리막길을 잠깐 걷습니다. 그러면 거기 악명높은 계단이 나옵니다. 화개재 계단으로 그전에 한 번 세었을 때 565계단이었나 싶습니다. 아마도 500미터는 족히 이어지는 계단일까 싶습니다. 내려갈 때도 좀 길다 싶으니 오를 때엔 얼마나 힘들겠어요. 지금과는 반대로 종주를 한다면 이쯤에선 해롱해롱하며 올라야 합니다. 마지막 고비라고나 할까요. 그 계단을 내려서면 거기가 화개재입니다. 여기서 왼쪽 내리막은 뱀사골, 직진하면 연하천대피소로 가는 오르막 능선입니다. 간단하게 산행할 때면 자주 이용하던 뱀사골길을 못 본 체 가는 건 당연하겠지요. 이리갈까 저리 갈까의 갈등이 필요 없는 종주산행, 해맑은 달빛처럼 유쾌합니다. 발걸음 경쾌합니다. 4.2키로미터를 더 가면 연하천대피소, 그 길로 갑니다. 아직 달빛이 무척 밝습니다.
뱀사골로 내려가면 아주 경쾌하게 산행을 마무리할 겁니다. 힘도 들지 않게 산행을 하긴 한 건가 싶게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연하천대피소를 선택합니다. 고생을 사서 하렵니다. 때로는 몸은 하자 하는데 마음이 말을 안 듣고, 때로는 마음은 하자 하는데 몸이 말을 안 듣는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고생을 사서 해야 하는 이유, 마음을 거부한 몸이 때로는 무리해야 마음이 독해지기 때문입니다. 그걸 극기라고 할까요, 인내라고 할까요, 의지라고 할까요, 그게 무엇이든 때로는 조금은 더 긴장하기, 조금은 고통을 즐기기, 그게 현실 삶에 도움이 됩니다. 내일의 더 강한 마음을 가진 나를 위해 오늘은 이 길을 갑니다. 기꺼운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오르막을 오릅니다. 돈 주고도 못 사는 고생을 몸으로 삽니다. 상쾌합니다. 아직 여명의 싸늘한 바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