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장터목 산장에서의 달달한 캔커피

영광도서 0 2,022

몸과 마음, 마음이 몸에게 말합니다.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고. 몸이 마음의 말을 받습니다. 인내는 쓰다 또한 그 열매는 아픔이라고. 몸과 마음은 때로 서로 떨어져 있습니다. 인간이기를 선언한 후 몸과 마음은 서로 떨어져 붙어 있을 때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다 몸과 마음이 드디어 하나로 있을 때가 있으니 몸의 고통이 극에 달할 때거나, 몸의 상태가 아주 좋을 때입니다. 그럴 때면 초집중현상이 일어납니다. 어쩌면 고통을 참는 이유는 그렇게 몸과 마음이 하나되는 순간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벽소령 달밤이 아름답다지만 한 번도 그걸 본 적은 없습니다. 지리산을 종주할 때면 가벼웠던 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하는 곳이 여기요, 인내심을 가동하기 시작해야 하는 곳이 여기입니다. 하루 산행의 중간쯤 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제 목표지점이 멀지 않구나 하는 안도감이 공존하는 곳도 여기입니다. 1년 만에 오노라니 변화가 눈에 띕니다. 벽소령 잔잔한 길, 그러나 낙석의 위험이 있는 길에 보호용 테크가 설치되어 있어 이채롭습니다. 죄로는 낙석 위험이 도사린 바위비탈, 우로는 멀리 열린 산그리메들, 우측으로 눈길을 던지면 저절로 마음의 기쁨이 몽글몽글 솟습니다. 지리산에 오고 싶은 마음, 첩첩히 겹친 산 능선들을 바라보는 즐거움 때문이니까요.

 

 

 

오전 열시를 향하는 시간, 발걸음은 점점 무게를 느끼면서 걷습니다.  벽소령에서 세석평전까지는 6.2키로인데 이 코스가 비교적 힘듭니다. 선비샘까지 2.4키로는 비교적 그런 대로 걸을만 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오르막이 좀 심한 편입니다. 성삼재에서 시작해서 종주를 한다면 이 지점쯤이 인내심을 시험할 지역입니다. 우선 선비샘에 이릅니다. 샘이 쫄쫄 거리며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고 샘다운 샘임을 자랑합니다. 지리산 정기를 받으려니 잠시 멈추어 물을 받아 속을 적십니다. 속을 훑고 내려가는 쾌감을 느낍니다.  다시 걷습니다. 오르막의 시작입니다.

 

 

 

마음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어디쯤에 내리막, 어디쯤에 계단, 힘겨울 곳, 이렇게 경험을 떠올리며 길을 그리려니 모르니만 못한 것 같습니다. 다가오는 미래를 지레 겁먹는 것처럼 미리 길을 그리며 걸으려니 더 힘든 것 같아 생각을 말기로 합니다. 지난해보다 조금 더 힘이 든 듯하여 걱정스럽지만 걸음을 조절하며 마음을 다독이며 걷습니다. 쌩쌩하던 걸음걸이도 마음과는 달리 이제는 터덜터덜 걸음이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립니다. 힘이 들면 다시 졸음이 엄습합니다. 그러나 정신일도하사불성이란 말로 마음에 주의를 줍니다.

 

 

 

사탕을 입에 물로 마음을 달래면, 그런 대로 졸음도 어느새 달아납니다. 조금 걸음도 가벼운 듯합니다. 몸도 인생도 달달함이 젤인가 싶습니다. 쓴 인내를 달달함으로 바꾸면서 게단을 오르고, 다시 내려오고 제법 센 계단 지대를 오르고 나면 세석평전이 드디어 가깝습니다. 드디어 고개에 올라섭니다. 이쯤이면 적이 안심입니다. 이제는 종주에 자신감을 가질만 하니까요. 세석평전에서는 장터목 산장까지 3.4키로미터, 거기서 천왕봉까지 1.7키로니까, 거리만으로도 그 정도야 어떻게든 걷는다는 자신감이 생기니까요. 영신봉을 지나고 세석평전, 열한시 십오분입니다. 잠시 쉬면서 고픈 배를 달랩니다. 짐을 최대한 줄이고 걷기 위해 준비한 찹쌀떡 하나면 그만입니다.

 

 

 

끝이 보이기 때문일까요. 지난해보다 오히려 발걸음이 가벼운 것 같습니다. 희망이 힘듦을 이긴 것 같습니다. 촛대봉에 오르니 걸음을 멈추라고 마음이 나를 멈춥니다. 상큼하니 고운 상고대가 나를 반깁니다. 모처럼 만나는 상고대를 정성스럽게 카메라에 담고 또 담습니다. 하늘도 지금은 오락가락 언뜻언뜻 파란 하늘이 드물게 나타났다 숨습니다. 아침에 좋던 날씨가 언젠가부터 바람꽃이 일면서 하늘이 온통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내리막길을 맞아 좀 더 속도를 내면서 걸으려니 체력이 회복된 듯 걸을 만합니다. 서너 번의 오르막, 서너 번의 내리막의 반복, 드디어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합니다.

 

 

 

열두시 십분, 제법 빨리 온 겁니다. 이제는 넉넉하니 산행을 마칠 수 있습니다. 가파른 오르막 천왕봉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이제껏 수고한 몸을 달래려고 대피소 매점에 들어가 1500원을 주고 캔커피와 바꿉니다. 사탕도 좋다지만 역시 달달한 음료가 이럴 땐 제격입니다. 달달함이 온몸을 감쌉니다. 이렇게 목구멍을 달래니 창자가 좋아라 합니다. 달달함이 온몸을 훑으니 마음도 좋아라 합니다. 따끈한 캔 커피로 힘을 얻은 마음이 그림을 그립니다. 조금 힘을 내서 오르다 보면 지금 상황으로 보아 멋진 상고대가 피어 있겟지, 그걸 감상하며 걷다 보면 정상에 가까울 테고, 그 다음엔 뭐 내리막이니까, 그리 그림을 그리다보면 어서 가자고 발이 움직거립니다.

 

 

 

인내는 씁니다. 그러나 마음에 그려지는 그림들, 그 그림이 현실이 될 때 느끼는 쾌감, 고통으로 산에 올라도 눈 앞에 펼쳐지는 경이로운 풍경 하나면 고통을 잊고 환호를 내지를 때 언제 고통스러웠냐는 듯한 마음의 보상, 그걸 달다고 하는 것이겠지요. 때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짜증나고 괴롭지만 제대로 사랑이 자라 서로 마음이 일치할 때 느끼는 한순간의 달콤함이면 그 모두를 용서하고, 그 모두를 백지로 만들고 거기 달콤한 그림을 그려 극한 기쁨을 주듯이, 산행 역시 그 원리가 작용합니다. 인내는 씁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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