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고지가 바로 저긴데
고지가 바로 저긴데.....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위적 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넘어지고 깨어지더라도
한 조각 심장만 남거들랑
부둥켜안고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새는 날 피 속에 웃는 모습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문득 거창하게 이은상 님의 '고지가 바로 저긴데'란 시가 떠오릅니다. 물론 고상한 내용을 나의 상황에 빗댄다는 게 영 안 어울리긴 합니다. 그럼애도 상황과는 관계 없이 이미 내 입술에 그 시가 와서 딱 달라붙습니다. 그 시를 읊조리면서 스틱을 움켜쥡니다. 장터목 산장을 벗어납니다. 천왕봉을 향해 걸음을 뜁니다. 백무동으로 내려갈 때엔 여기에 가방을 놓아두고 빈 몸으로 올라갔다 내려왔으나, 이번엔 중산리로 내려갈 터라 가방을 짊어지고 오릅니다. 나서자 마자 깔딱고개와 만납니다. 층층이 가파른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도장 찍듯 눌러 밟습니다. 염려했던 것보다 좀 수월합니다. 무릎도 아프지 않습니다. 숨도 그리 차지 않습니다. 부지런히 온 만큼 시간을 벌어 두었으니 여유롭게 올라도 충분하니까요.
제석봉이 다가옵니다. 한 고비 넘겼다고 마음을 다독입니다. 어디서 일었는지 사정없이 몰아치는 거센 바람, 대기를 가득 바람꽃으로 메웁니다. 무슨 한이 그리 많아 서러워 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분노에 찬 성질 더러운 중년 남자의 씩씩 거리는 소리 같기도 한 바람이 소동을 일으킵니다. 날릴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날릴 듯, 눈가루를 싣고 대기를 뿌옇게 만들며, 드센 소리를 내며, 대기를 차갑게 식히며 요란을 떱니다. 그 덕분에 나뭇가지마다 상고대가 피기 시작합니다. 경사가 급하게 오르는 길,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상고대 역시 점차 진해집니다. 비록 하늘은 뿌옇지만 눈 앞 풍경은 볼만합니다. 지리산 하룻길이 거하게 환영하는 것 같아 기분 좋습니다.
조금 숨가쁘게 오르막을 오르면 거기 제석봉이 추위에 떨며 흔들거립니다. 조금 더 걸어 제석봉을 지나면, 내리막입니다. 길게 숨을 토하고, 피아노를 조율하듯 숨소리를 길게 조율하고 숨 고르기로 내리막을 맞이합니다. 내리막이 끝날 즈음엔 다시 오르막이 다가옵니다. 내리막이 오르막을 낳고, 오르막이 내리막을 낳는 한두 번의 반복, 눈꽃 바람이 베풀어준 멋진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또 담으며 오르다 보면, 내가 힘들었나, 다리가 노곤했었나 싶게 그걸 잊습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몸도 그만 정신 못 차리고 같이 즐거워합니다. 하늘도 파란 배경을 베풀어주면 더할나위 없겠으나, 그렇지 않아도 하얀 눈꽃이 베풀어주는 풍경 덕분에 힘든 것 잊습니다.
고맙다 고맙다 마음으로 외치면서 오르다보면 하늘로 통한다는 통천문입니다. 예서부터 다시 계단으로 이어지는 급경사지만 그야말로 '고지가 바로 저긴데' 이 시구를 읊조리기에 적당한지라 참을 만합니다. 병아리 물통에 물 마시듯 풍경 한 번 보고 한 걸음 떼고, 걸음 떼고 풍경 보고, 보고 떼고, 마음을 달래면서 남은 힘을 거의 쏟는다 싶으면, 아! 정상입니다. 이럴 땐 앞에 '드디어'가 어울리려나요. 드디어 정상입니다라고. 오후 한시 이십분입니다. 걸어온 길 뒤돌아보니 참 멀고 멉니다. 떠나온 곳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렸을 적, 아니 간난이 적 기억이 전혀 없듯이 출발한 곳이 보이지 않습니다. 돌아보니 뿌듯합니다. 28.2키로미터를 숨가쁘게 걸어왔으니까요.
별 탈 없이 여기까지 온 것이 대견스럽습니다. 가끔 살다가 인생을 돌아보면 참 열심히 살았구나, 다행스럽게 오늘까지 왔구나, 지금의 내가 대견스럽구나, 그렇게 생각하듯이, 온 길 돌아보니 뿌듯하고 대견스럽습니다. 오늘은 노고단부터는 혼자 걸어왔습니다. 종일 혼자였습니다. 오다가 반대쪽에서 오는 이들과 지나치기는 했으나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걷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새벽에 둘이 올라온 사람이 다였으니까요. 그런데 천왕봉 정상에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비석 앞에서 서로 인증샷을 남기려고 붐볐습니다.
인물 사진 안 찍기 시작한 지 벌써 수년인지라 조금 머물다 하산을 시작합니다. 중산리로 방향을 잡습니다. 아직 올라오는 이들이 제법 많습니다. 다리는 좀 노곤하지만 하산길은 숨이 차지 않아 걸을만 합니다. 꾸준히 내 속도로 걷습니다. 중산리로 내려가면서는 같은 방향으로 하산하는 이들과 많이 지나칩니다. 비록 하루종일 걸었지만 그래도 속도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빠릅니다. 달달한 환타가 그립습니다. 그걸 마시고 싶어서라도 걸음이 서두릅니다. 동네 야산을 걸을 때는 500미터는 금방 지나가는데 지리산은 500미터도 꽤나 멀게 느껴집니다.
법계사를 지나면서는 아이젠을 풉니다. 발이 날듯 가볍습니다. 그대로 속도를 유지하면서 하산하는데 누군가 따라옵니다. 나를 따를 사람이 없는데 산을 잘 타나 봅니다. 물론 종일 걸어 지치긴 했으나 보통 이상으로 빨리 걷는다고 생각했는데, 제법 빨리 따라옵니다. 누군가 따라오니까 그냥 앞서 보낼까 하다가 그대로 속도를 유지합니다. 따라 잡으려는 사람 덕분에 생각보다 중산리에 도착합니다. 조금 남을 의식하니까 저절로 걸음이 빨라진 덕분에 힘든 걸 잠시 잊었나 봅니다. 중산리에 도착하니 오후 세시이십분, 버스 시간을 확인하니 30분 기다려야 합니다.
환타 한 병을 사서 입에 들이붓습니다. 오렌지 색깔 만큼이 달콤한 기운이 온몸에 퍼지는 듯 기분이 하늘로 오릅니다. 출발할 때 염려했던 지리산 하룻길, 작년보다 더 뿌듯합니다. 작년보다 세월의 무게를 당연히 짊어졌다 생각했는데, 더 수월한 것 같으니, 빙긋 내가 나에게 웃어줍니다. 지리산을 하루에 종주하겠다는 마음먹은 나에게, 두려움을 마다 않고 새벽산행을 시도한 나에게,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은 나에게, 과정 과정을 잘 조절하면서 잘 걸어준 나에게, 하나 하나 모두 고맙습니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나는 기쁩니다. 나는 내가 자랑스럽습니다. 나의 도전, 나의 인내, 나의 의지 그 모두가 자랑스럽습니다. 내가 나를 칭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