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대문 밖 어머니의 그 자리

영광도서 0 1,940

"잘 가!"

 

가다가 돌아서서 손을 흔듭니다. 가다가 다시 돌아봅니다.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는 분이 있습니다. 또 손을 흔듭니다. 이제는 들어가셨나 뒤돌아보면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다시 손을 흔듭니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깁니다. 멀러질수록 가벼워지는 게 아니라 무거워지는 발걸음, 한두 걸음 더 가면 보이지 않을 그 자리에서 다시 돌아봅니다.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면서 물끄러민 나를 보고 있습니다. 다시 손을 흔듭니다. 그렇게 꽤 여러 번, 마지막이다 싶게 다시 돌아보면 여전히 그 자리,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추어 내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말은 없어도 잘 가란 마음 속 음성이 전해옵니다.

 

 

 

어머니 집에 다녀올 때면 항상 대문 밖으로 나오셔서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내 뒷모습을 지켜보시던 어머니, 지금 저 자리, 저 자리엔 엄마는 안 계십니다. 그 대신 저 자릴 지켜서서 내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는 큰형입니다. 그 자리를 면하고 이제는 대문이 보이지 않는 곳에 이르니 뭉클 하는 어떤 뜨거운 덩이가 가슴 밑바닥에서 쑥 올라오는 기분입니다. 어머니가 계셔야 할 저 자리에 큰형이 있어서라는 것도 있지만, 다른 하나는 큰형도 엄마를 쏙 빼닮았구나 하는 생각의 덩이이기도 합니다. 물론 어머니가 서 계실 그 자리, 어머니로만 본다면 그 자리는 비어 있는 셈이지요.

 

 

 

어머니 집에 다녀올 때면 늘 어머니는 대문 밖까지 나오셔셔 "이제 가면 언제 또 오니?"란 인사에다 "그래, 자알가" 어머니 특유의 길게 늘어지면서 여운이 긴 음성으로 인사를 하시곤,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내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셨습니다. 내가 돌아서서 손을 흔들면, 당신도 흐느적거리듯 힘 없는 움직임으로 손을 흔들어주셨습니다. 마치 바람이 덜 불어 힘겹게 흔들리는 작은 깃발처럼 그렇게 손을 흔들어주셨습니다. 그렇게 대여섯 번의 뒤돌아보고 손흔들기를 공유하고는 이별식을 끝내고 내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 의식이 작년부터는 조금씩 간소화되었습니다. 문밖에 까지만 간신히 나오셔서 특유의 느린 말씀으로 잘 가라고 하시던 어머니, 더는 이제 가면 언제 또 오니라는 질문을 생랙하시고 그냥 자아알가 정도의 인사만 하시던 어머니, 대문 밖에서 문 밖으로 영역이 축소된 공간으로 물러나신 어머니, 그 생각을 하면 어머니 집에 다녀올 때마다 마음이 아렸습니다. 그렇다고 다시 그리운 옛날로 되돌릴 수는 없는 게 삶이요 인생인지라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한다 생각하니 연초부터 인생이 서글펐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면 기꺼이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만 하는 게 인간이 아니겠어요.

 

 

 

어머니의 영역은, 아니 어머니와 나의 이별식 공간은 이젠 방문 밖으로까지 축소되고 말았습니다.  그걸 생각하려니 울음 덩이가 목울대를 타고 올라와 당장 터져나올 것 같아 얼른 방문을 떠나 문 밖으로 나섰습니다. 어머니의 가녀린 모습이 뒤에서 나를 줄로 끌어당기는 것처럼 뒷걸음이 무거웠습니다. 여지 없이 문 밖으로 따라나오시던, 기어이 대문 밖으로 따라나오시던, 내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내 뒤를 지키시던 어머니, 지금 내 뒤에는 어머니가 따라오지 않으십니다. 아니 따라오지 못하십니다. 그건 서럽지만 내 뒤를, 어머니처럼 따라나오시는, 어머니를 대신한 이가 있습니다. 

 

 

 

"잘 가!"

 

정확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나에게 인사를 건네곤 어머니처럼, 똑같은 그 자리에서 나를 배웅합니다. 돌아보고 손 흔들고, 돌아보고 손 흔들고, 거의 흡사합니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어머니가 아닌 큰형이 그 자리를 지킨다는 것이고, 잘 가라는 인사와 함께, 그 다음엔 어머니처럼 내 뒷모습을 지켜는 보되 더는 손은 흔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힘 없이 흔들리는 작은 깃발 같은 어머니의 손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다릅니다. 큰형은 여지 없이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이제는 큰형이 어머니를 대신할 거란 생각을 하니 뭉클하고 설움이, 인생에 대한 설움이 솟아오르는 걸 어쩔 수는 없었습니다. 

 

 

 

새해들어 벌써 열흘이 훌쩍 지났습니다. 늘 같은 자리, 자리는 그대로 있어도 주인이 바뀐 자리는 이미 다른 자리입니다. 늘 같은 시간이라도 그 시간에 다른 존재가 있다면 이미 다른 시간입니다. 그렇게 모두가 흘러가고 지나가고 변해갑니다. 그렇군요, 모든 것이 가는군요. 모습은 달라도 어머니의 그 자리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큰형, 인생이란 그런 것인가 합니다. 지금이 좋다면 모든 것이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키고, 그 순간이 그대로 이어지기를 바라지만, 그렇지 않아 인간의 일이며, 인간이라는 걸 알기에 새해엔 그걸 배워야겠습니다. 피할 수 없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슬프지 않을 수 없으나 적게 슬프게, 힘들지 않을 수 없으나 덜 힘들게 받아들이는 연습, 가능하다면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겠습니다.  어머니 대신 대문 밖 그 자리를 지키는 큰형, 그래도 큰형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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