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무등산, 참 아름다운 날

영광도서 0 1,814

저승 문 앞에 이르렀습니다. 온통 하얀 벽, 하얀 색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방 안으로 베드로 사제가 그 방으로 인도했습니다. 검은 색 옷을 입은 이들이 한 사람 한 사람씩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재판장인 듯한 사제가 내 바로 앞에서 판결을 받은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다 왔느냐?"

 

"세상은 온통 걱정, 근심, 슬픔, 질병, 시기, 질투, 분노로 가득해서 늘 걱정하고 슬프게 살다가 왔습니다."

 

"그러냐, 그러면 너는 그걸 보상 받기 위해 슬픔을 기쁨으로, 근심을 희망으로, 분노를 칭찬으로 바꿀 수 있을 때까지 다시 세상에 나가 살다 오도록 하마."

 

그 판결과 함께 앞에서 재판을 받은 사람은 하얀 벽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내 차례가 되자 판결을 맡은 사제가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네, 저는 세상에서 아주 아름다운 것들을 무척이나 많이 구경하고, 아주 즐겁게 지내다 왔습니다."

 

"그러냐, 그러면 너는 이제 세상에 다시 내려가 그 아름다운 것들을 잘 기록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일을 하다가 오너라."

 

 

 

'내가 만일 저승에 간다면' 이란 가정을 세우고 이런 상상을 했습니다. 무등산 정상에서 서북쪽으로 내려오면 서석대의 아름다움을 실컷 볼 수 있습니다. 전망대에 서면 걸음을 멈추고 거기 그대로 머물고 싶습니다. 하산이 싫습니다. 그럼에도 산 아래 적을 두고 살아가는 존재인지라  하산을 시작합니다. 오를 때의 힘겨움과 달리 하산할 때 마음은 가볍습니다. 숨도 차지 않고 저절로 발이 움직입니다. 여전히 아름다운 풍경이 눈을 즐겁게 하고, 눈 안에 동공을 아주 말끔하게 씻어주는 듯합니다.

 

 

 

상쾌한 마음으로 언덕을 내려오면 눈 앞에는 하얀 길이 뚜렷이 펼쳐집니다. 중봉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봄이면 봄대로 연초록길을 펼쳐서 그 가운데로 걷게 합니다. 여름이면 짙은 녹색의 억새들이 자라서 뚜렷하게 길을 보여줍니다. 가을에는 황금들녁처럼 억새들이 넘실거립니다. 그리고 지금 이겨울엔 온통 하얀 가운데로 운치 있는 길 하나 나를 유혹합니다. 혼자 걸으면 혼자인 대로 사색에 잠겨 걷게 하는 길, 둘이면 둘인 대로 다정한 대화를 나누며 걸을 수 있은 편안한 길, 구도자의 길 같습니다. 그 길을 걸으면서 엉뚱한 생각 한 번 해 봤습니다. 내가 지금 천국에 있다 생각하고 말입니다.

 

 

 

아름다운 풍경이 감사합니다. 기회를 준 신에게 감사합니다. 오늘 여기로 인도한 내 마음에, 내 살짝 어그러진 계획에, 온통 아름다운 세상에 감사한 것이지요. 언젠가 내가 신 앞에 설 때 신께서 내게 "너는 세상에서 무엇을 하다 왔느냐?" 물으시면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신께서 창조하신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러 다니느라 바빴노라고, 아름다운 피조물들이 너무 많아 그걸 열심히 구경하러 다녔노라고 대답해야지, 그러면 신께서는 "네가 내가 지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았다니 참 잘했다. 내가 지은 세상을 불평하지 않고 아름답다 하니, 좋다 하니, 너는 참으로 심미안이 있는 놈이로구나. 그러니 너는 다시 세상으로 가든 이곳에 머물든 아름다운 것을 찾아다니며 내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실까? 그렇게 생각하니 빙그레 웃음이 나옵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뒤로 하고 하산하면서 지나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눕니다. 가장 친절한 말로, 가장 기분 좋은 말로 인사를 나눕니다. 인자요산이 실감나는 순간들입니다. 봄이면 봄대로, 여름이면 여름대로, 가을이면 가을대로, 각기 다른 아름다움으로 마음을 편하게 이끄는 길, 그 길 위에서 서면 순례자가 된 듯도 하고, 나 스스로 방랑시인이 된 듯도 하다는 그 생각을 하며 중봉에 오릅니다. 그리고 여전히 하산길 또한 아름답습니다. 중봉에서 정상을 건너다 보니 펄럭거리며 지나는 구름 아래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산정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실루엣으로 살짝살짝 자신의 자태를 감추는 아름다운 여인네 같습니다.

 

 

중봉을 지나 동화사터에 이르는 길에도 상고대가 참 곱습니다. 그 상고대 위로 열린 하늘 여전히 곱습니다. 참 아름다운 날입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날, 거의 하산을 마무리할 때면 후두둑 거리는 소리, 눈꽃들이 무너져 내립니다. 아름다운 세상이 변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을 누리지 못하면 그뿐 시간이 지나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난 자리엔 아름다움도 변하거나 사라집니다. 순간을 누리지 못하면 그 아름다움은 다시 없습니다. 그걸 누리고 누리는 내가 나는 참 좋습니다. 마음에 가득 아름다움을 담고 무등산을 나옵니다. 내 마음에 다가온 신이 나에게 묻습니다. 오늘은 어떠하냐고, 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세상은 참 아름답습니다. 매일이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어요."

 

신께서 이렇게 마음에 대답하겠지요.

"세상이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그건 너의 선택에 달려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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