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좌충우돌 유쾌한 영화 읽기-7- 애인, 누구나 살면서 한두 번쯤 꿈꿀 수도 있을 사랑이야기
이런 사랑도 있다. 지구에 사는 인구가 70억이라면 70억 가지의 사랑이 있을 거라고 누군가 말했다. 다른 동물과 달리 감정을 속일 줄 아는 인간, 생각도 참 다양하게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많지만, 아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은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으면 혀를 끌끌 차거나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일도 아니다. 인간은 아주 다양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다양한 생각을 하며 사니까 이런 저런 별의별 인간이 많은 건 당연한 거니까.
"혼례식 땐 우아한 게 좋고, 야외 촬영 땐 화려한 게 좋아요. 이렇게 아름다우시니, 신랑 되신 분은 좋겠어요.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영화의 시작이다. 예식업체 담당자가 묻는다. 여자에게 묻는다. 어떻게 만났느냐는 질문과 함께 그녀는 추억 속으로 들어간다. 지금 결혼하는 신랑이 아닌 애인과의 추억이다. 영화의 거의 전부는 지금 결혼하려는 신랑과의 이야기는 양념일 뿐, 애인과의 추억이 거의 전부다.
하필이면 결혼을 위한 야외촬영을 하는 날, 다른 남자가 떠오른다. 그녀는 과거 속으로 들어간다. 아름다운 과거 속이다. 매력이 있는 남자, 한 남자가 그녀에게 작업을 건다. 작업을 걸어오는 남자, 그런데 거부하면서도 거부하기 싫다. 한 번의 우연, 두 번의 우연, 손가락을 다치고, 손가락에 밴드를 붙여준다는 핑계로 다가온 이 남자, 손과 손의 접촉으로 사랑놀이를 시작한다. 겉으로는 거부하면서도 싫지 않다.
앞으로 한 달이면 결혼이다. 7년이나 사귀었으니 곡절이 왜 없으랴. "7년 동안 사랑만큼 지옥을 같이 키워온 거야. 누구도 지옥에서 벗어날 수는 없어." 이것이 인간의 숙명일까, 인간의 숙명일까? 지옥인 줄 알면서도 결혼한다고, 하긴 인생이나 결혼이나 지옥인 줄 알면서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일 테니까. 남편감과의 관계를 잠시 접어두고 1박 2일 간 애인과의 시간들, 어쩌면 연애한 7년의 세월보다, 앞으로 살아갈 수십 년의 세월보다 더 추억으로 남을 2일간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비록 이틀이지만 뜨겁게 즐긴다. 다시 올 수 없는 시간들이니까. 남자는 내일 떠날 것이다. 그걸로 둘의 관계도 끝날 테니, 지금 시간들을 화끈하게 즐기는 것이다. 화끈하게 마시고, 화끈하게 성을 즐긴다. 그리고 남는 시간, 남자군과 여자양이 성모상 앞에서 단 둘만의 결혼식을 올린다. 다른 결혼식과는 달리 익명이다. 남자군과 여자양의 결혼식이다. 남자군이 직접 주례를 하고, 주례인 넘자군이 남자군 자신에게 묻고 아니오로 답한다. 주례 남자군의 물음에 여자양 역시 아니오로 답한다.
예물 교환 시간, 여자가 이미 어디서 반지를 끼고 왔으므로 예물교환은 생략한단다. 그렇게 둘은 진지한 듯 장남인 듯 결혼식을 마치고 야외 공원 벤치에 앉아 사랑을 나눈다. 페인트로 벤치에 두 사람의 손을 잇는 그림을 그린다. 다음에 돌아오면 잊지 않으려고 그린단다.
그 다음은 두 사람은 신혼여행을 간다. 하룻밤의 신혼여행이다.
여자는 말한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애인으로 지내는 게 좋아. 영원한 애인으로. 좋은 남자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싶어. 너무 좋아서 누구한테도 말하고 싶지 않은 남자, 할머니가 돼서도 행복한 추억으로 기억될 남자. 난 당신한테도 그렇게 기억되고 싶어."
남자는 말한다.
"당신은 나쁜 여자야."
"그래 난 나쁜 년이야."
이제 두 사람이 헤어져야 한다. 남자는 공항으로 갈 것이고, 여자는 남편감에게 돌아갈 것이다. 남편감 그는 자신의 여자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건 잠시일 뿐이라며, 여자를 포기하지 않는다. 7년간 사귄 이 남자는 여전히 다른 남자를 사귀는 이 여자를 기다려준다. 이름 없는 남자군 그는 그냥 애인, 이틀간의 애인일 뿐이다.
남자군과 여자양이 길로 나선다. 이제 두 사람은 서로 존대로 말한다. 남자는 꿈이 행복해지는 거라고 한다. 여자가 원하면 애인을 넘어설 수 있다는 늬앙스다. 여자는 그 말에 대답이 없다. 남자는 말한다.
"잊지 말아요. 언제 어디서 만날지 모르잖아요."
"또 작업 걸려고요?"
"넘어오지도 않을 거면서요?"
남자가 여자를 더 좋아하는 것일까.
"당신 멋있게 늙을 거예요."
야외 공원 벤치에 앉아 둘은 사랑을 나눈다. 그러면서 남자가 "손 좀 줘 봐요." 하며 여자의 손을 잡는다. "당신 닮았네. 꼭꼭 짜인 게." "잘 풀려진 매듭은 정성이 들어가지 않은 거잖아요. 그런데 아무리 힘 있게 조여도, 언제나 조그만 공간은 남아 있더라고요."
빈틈이라곤 없는 이 여자의 이틀간의 외도는 이제 이 대사와 함께 끝난다.
남자는 걸어서 간단다. 여자는 택시에 오른다. 남자는 물끄러미 아쉬운 듯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가 돌아오면 새로운 시작이 되련만. 여자가 탄 택시가 신호에 결려 멈춘다. 길지 않은 시간, 여자는 택시 문고리를 잡고 망설인다. 돌아갈까 말까, 남자는 여전히 바라본다. 신호가 바뀐다. 이 여자, 조금 빈틈, 이틀의 빈틈을 보인 이 여자, 택시 문에서 손을 떼고 운명에 맡긴다.
야외촬영 날이다. 추억에서 빠져 나온 시간이다. 여자의 야외촬영장, 하필이면 남자와 함께 왔던 의자, 거기에 두 사람의 손이 잇닿은 그림이 하얗게 남아 있다. 여자가 멍하니 바라본다. 재촉하는 소리에 자리를 뜨는 여자, 남자는 야외촬영 업체에 근무하는 사람일까, 그렇게 돌아온 것일까? 남자가 얼핏 촬영하기 좋은 날이라는 말을 남기며 지나친다. 서로 못 알아본 것일까? 그렇게 다시 스치면서, 그러나 서로는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순환구조로 짜인 이 영화, 인물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그냥 남자와 여자다. 서로 이름을 알 이유 없는 만남, 상처 난 손을 핑계로 만나, 이들은 뜨겁게 사랑했고, 깊이 사랑했다. 벤치에 지워지지 않을 손을 그렸다. 두 사람의 손을. 흔들리지 않는 여자의 손, 그 손을 놓았다.
그리고, 그래서, 그렇지만........
그냥 애인으로 남았다. 언제까지 잊히지 않을 애인으로. 영화다. 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 아니 살면서 여러 번 꿈을 꿀 수도 있을 이야기다. 짧아서 더 아쉽고, 짧아서 더 여운이 남는 것일까?
일반적인 사랑이 아닌, 사회에서 빗나갔다고 생각하는 사랑, 불륜이라거나 바람이라거나 이런 사랑은 영화에서 또는 문학에서 아름답게 그리는 것일까? 아주 오랜 선조들의 난혼의 결합형태 또는 군혼이나 대우혼의 기억을 그대로 안고 사는 탓일까?
영화란 그렇다. 소설도 그러하듯이. 그러니까 영화나 소설은 사실이라기보다 살고 싶은 이야기이거나 아주 드물게 누군가는 그렇게 살 수도 있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까 영화려니, 소설이려니 그리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너무 부러워할 것도 아니고, 너무 욕할 것도 아니다. 가면을 벗어던진 우리들의 솔직한 이야기라고, 본능이라고 치부하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