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좌충우돌 유쾌한 영화 읽기-37- 나의 독재자,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지난한 여정

영광도서 0 1,870

나는 누구일까? 진정한 나는 말이다. 지금의 나, 나라고 생각하는 지금의 나가 진정한 나인지, 아니면 나라고 믿을 뿐인 나인지 모르겠다. 인간이란 탈을 쓰고 살다보니, 다른 말로 다른 사람들이 부여한 역할로 살다보니, 그 역할이 나인 걸로 착각하고 사는 것은 아닐지 나는 모르겠다.

 

"나는 리어왕이 아니다. 리어왕이 이렇게 걷더냐? 이렇게 말하더냐? 너의 눈은 어디 있느냐? 지금 깨어 있는 것이냐? 아니 꿈이겠지. 내가 누군지 말해줄 사람이 있더냐?"

 

"리어의 그림자요."

 

"넌 누구냐?"

 

"진실은 개가 된지라. 매질을 당하여 들판으로 쫓겨나고, 웬 바보 당나귀가 말을 끄니 이상하다 생각지 않겠느냐. 어느새 광대들의 인기도 식었고, 지혜 있는 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네. 그들은 지혜로운 법을 잊어버리고 하는 짓은 광대 바보 같았다. 그들은 기뻐서 울었고, 나는 노래했네. 아! 늙고 애처로운 왕이시여. 당신의 광대에게 거짓말하는 법을 가르쳐주오. 나는 거짓말하는 법을 피하고 싶소."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리어왕>의 연극 대사, 이 영화는 이 대사로 시작한다. 이 대사가 이 영화의 복선이자, 처음이며 마무리다. 수미쌍관법을 잘 보여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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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인 나 김태식은  8년 동안 대사라고는 정확하게 128자를 말한 연극배우의 아들이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아들에게만은 자랑이고 싶다. 내레이터가 "나의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악역"이라고 말했듯이 그 비극의 주인공이다. 대사에서 내가 지금 깨어 있는지 누구 말해줄 수 있느냐고 했듯이 이 영화는 한 개인의 정체성의 혼란을 이야기한다.

 

세상에 진실은 있느냐고 묻는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것의 진실은 왜곡되어 있고, 다른 사람의 역할이나 하는 배우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그림자로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계속 그 역할을 수행하다 보니 그 존재가 나 자신인 줄 착각하고 산다.

 

나의 아버지, 그는 위대한 독재자 김일성이다. 그리고 나는 피라미드 회사의 강사다. 돈은 희망이 아니다. 돈은 행복이 아니다. 돈은 곧 힘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돈이 궁한 청년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제법 재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김일성이라고 믿으며 그 재산을 전혀 손대지 못하게 한다. 그게 불만이다. 도무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 정신병자다.

 

내가 어렸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바뀌었다. 완전히 과대망상증환자가 되었다. 아버지 자신을 독재자 김일성으로 믿고 그렇게 수십 년을 살고 있다. 말투도 행동도 완전 김일성 흉내만 낸다. 이해할 수 없다.

 

나의 아버지 김성근, 아버지는 극장에서 변변한 배역 하나 맡지 못하고 그저 배우의 꿈만 키우는 삼류 배우였다. 극장 청소나 하고 포스터나 붙이러 다니는 일이나 하는 그런 배우 아닌 배우, 그렇게 근근이 아들 하나 데리고 홀어머니 모시고 살았다. 극장 청소를 하면서 배우들이 연습하는 대사를 들으며 대사 하나만큼은 줄줄 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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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그 재주, 리어왕 역을 맡은 선배가 감독과 트러블이 생겨 배역을 거부한다. 공연은 잡혀 있다. 김성근, 꿈에 그리던 그 배역을 맡는다. 대사를 잘 외운다는 이유 하나로. 이 사람 신난다. 열심히 포스터를 붙이고 꿈에 부푼다. 변변한 배역 하나 맡은 적 없어 아들에게, 어머니에게 떳떳하게 보여주지 못한 연기, 이번엔 제대로다. 해서 아들과 어머니를 초대한다.

 

공연 날, 아들은 꽃다발을 준비한다. 공연 시작, 감독은 그냥 잘하려 말고 대사나 외우란다. 그가 무대로 나선다. 그런데 너무 긴장한 탓인지 그렇게 줄줄 외우던 대사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연극은 완전 물먹었다. 무대에 돌아와 감독에게 꾸중 받고 얻어터졌다. 그럼에도 아버지에게 꽃다발을 주러 왔던 아들인 나와 어머니는 슬그머니 그 자리를 피했다.

 

그게 불행의 시작이었다. 이제는 연극 무대를 떠나야 할 그에게 접근한 남자, 다짜고짜 꼭 필요한 재능을 가졌다며 오디션에 오란다. 그 오디션, 많은 경쟁자들이 왔지만 그가 합격이다. 신인 배우, 입이 무거울 것, 연기를 너무 잘해도 안 될 것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원하는 배역은 다름 아닌 7.4공동성명이 발표되고, 있을 수도 있는 남북정상회담을 할 때 북의 정상 대역을 할 배우를 필요로 했던 것, 그 배우를 완전히 김일성과 똑 같게 변신 시켜서 정상회담을 찍는 것. 그러다 보니 그에 걸맞으면서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으려면 인내심이 강하고, 입이 무거운 사람이어야 했던 것. 그것을 알 리 없는 성근은 아들에게 자랑을 한다. 그리고 찾아간 곳, 다짜고짜 매질에 얼차려에 정신이 쏙 빠진다. 그에게 사상교육, 이를테면 김일성이 알아야 할 사상을 교육할 사람은 골수 운동권 학생이 고문에 못 이겨 그를 맡아 가르친다. 그에게 연기를 지도할 교수, 이렇게 한 팀이다. 이들은 김일성 대역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온갖 고문과 과정을 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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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덕분에 성근은 힘겨운 살림살이를 벗고 그럴 듯한 집을 구한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그 프로젝트는 없던 일로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집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이 김일성이라 믿고 살아간다. 그는 완전히 세뇌 당한 것일까, 일부러 그런 것일까, 그때부터 아버지는 김일성으로 살았다. 행동도 생각도 말도 완벽한 김일성, 그간의 연습이, 그간의 사상 교육이 아버지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 때문에 괴롭다. 달러돈을 썼는데, 그 돈 때문에 수모를 당하기 일쑤다. 집이라도 팔면 좋으련만 나의 독재자는 아직도 그 집이 독재자의 집무실인 줄로만 알고 꿈쩍도 안한다. 게다가 나를 따라다니는, 스토커처럼 나만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 게다가 임신까지 했단다. 그 아이를 떼라고 했더니 이 여자 떠나버렸다.

 

다행이랄까, 집 주변이 재개발된단다. 덕분에 땅 값 상승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모든 이들이 집을 팔고 떠났다. 달랑 이 집만 남았다. 달러 빚 준 놈이 몰래 도장을 찾아내서 이 집마저 팔았단다. 절망적인 상황, 기적이라면 기적일까, 낯선 사람들의 방문, 폐기 됐던 프로젝트의 부활이다.

 

남북정상을 위한 리허설의 완전한 대역으로 그를 찾으러 온 것이다. 독재자로만 살던 아버지가 지나가는 아이를 보고 조금씩 기억을 찾아오던 차였다. 어느 정도 기억은 돌아왔으나 아직 과대망상인 것 같은 아버지가 그들을 따라나선다. 그러면서 그의 제안은 자신의 연기를 아들이 보게 한다는 조건이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연기, 완벽한 김일성이다. 영락없는 김일성의 재현이다. 우리 측 정상 앞에서도 마치 실제 김일성처럼 호탕하게 호통을 쳤다가, 필요조건을 요구했다가 완벽한 김일성 행세를 한다. 우리 측 정상이 기가 질려 연기를 중단할 정도다. 그러고도 그의 연기는 계속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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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 역이 끝나자 이어지는 대사는 리어왕 대사다. 자나깨나 ‘혁명위업’을 외치며 스스로를 김일성이라 굳게 믿는 아버지, 헤어스타일부터 옷차림, 몸짓과 손짓, 말투 하나까지 김일성과 꼭 닮은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며 마트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현장지도를 하고, 눈만 마주치면 자급자족, 민족경제를 부르짖는 독재자 모습, 그 아버지가 변한 것이다.

 

고집불통 독재자가 아닌 진심을 숨긴 평범한 아버지로 돌아서는 성근의 변화, 아들이 눈물을 흘린다. 그거였다. 위대한 독재자로 살아야 했던 아버지의 진심은 아들에게 제대로 연기를 보여주고 싶었던 그 꿈을 마지막으로 실현한 것이다. 가장 완벽한 연기였다. 아들이 본 연기는 아주 어설펐던 리어왕의 영 역할을 했던 모습, 그리고 두 번째이자 마지막 연기였던 독재자 역, 평소에도 완벽했던 역이긴 했지만, 리허설의 대역이지만 진짜와도 전혀 다르지 않은 역, 그 역을 아들은 감명 깊게 바라보며 운다.

 

그러고도 성근은 마지막 대사를 내뱉으며 아들에게 진 빚을 갚는다. 바로 아들에게 정말로 보여주고 싶었으나 대사를 하지도 못하고 하얗게 머리가 비어서 못했던 대사, 그 대사를 지금 완벽하게 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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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리어왕이 아니다. 리어왕이 이렇게 걷더냐? 이렇게 말하더냐? 너의 눈은 어디 있느냐? 지금 깨어 있는 것이냐? 아니 꿈이겠지. 내가 누군지 말해줄 사람이 있더냐?"

 

"리어의 그림자요."

 

"넌 누구냐?"

 

"진실은 개가 된지라. 매질을 당하여 들판으로 쫓겨나고, 웬 바보 당나귀가 말을 끄니 이상하다 생각지 않겠느냐. 어느새 광대들의 인기도 식었고, 지혜 있는 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네. 그들은 지혜로운 법을 잊어버리고 하는 짓은 광대 바보 같았다. 그들은 기뻐서 울었고, 나는 노래했네. 아! 늙고 애처로운 왕이시여. 당신의 광대에게 거짓말하는 법을 가르쳐주오. 나는 거짓말하는 법을 피하고 싶소."

 

그 일이 있은 후, 북의 독재자가 죽었고, 얼마 후 성근도 죽었다.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은 나 태식은 아버지 없는 아이의 모습을 생각하며 제 아이를 밴 여자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는 괜찮은 아버지 준비를 한다. 평생 독재자를 자신으로 알고 살았던 아버지를 향해 나는 말한다.

 

"그것이 꿈이 아니라면 다시는 깨지 않기를 바랍니다. 친애하는 나의 독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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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 아들의 자랑이고 싶은 아버지, 우리 모든 아버지의 모습이 아닐까. 김현승 시인의 시중 <아버지의 마음> 그 일부를 옮겨볼까.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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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의 마음도 이랬으리라. 아들에게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온갖 고통을 참아냈는데, 아들과 아내를 실망하게 만들었으니, 얼마나 마음 아팠으랴. 아들을 실망하게 만들었던 첫 무대, 그리곤 그야말로 독재자의 그림자로 살아야 했던 20년의 세월을 그는 마지막 무대에서 벗은 셈이다. 오직 아들에게 한 번만이라도 연기다운 연기를 보여주고 싶었던 아버지의 신념이었을 것이다. 그 신념 때문에 그토록 고통을 겪어야 했고, 평생을 남의 대역으로 살아야 했을 터였다. 그리고 그게 자신인 줄 알고 살아왔을 터였다. 그는 20년을 내가 아닌 남으로 살았다. 그 남을 바로 자기 자신으로 알고 살았다. 제 정체성을 모르고 살았다. 남의 그림자로 살았다. 꿈속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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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만 그럴까. 우리 모두 아버지라는 가면, 그럴 듯한 가면을 쓰려고, 얼마나 삶의 현장에서 때로는 고심하고, 때로는 모욕을 당하고, 때로는 아프랴. 그럼에도 아이들 앞에선 또는 아내 앞에선 그런 그림자를 내색 않고 살아가고 있던가.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가 대신할 뿐이다. 그러다 보면 가면 쓴 자신이 실제 자신인 줄 착각하고 살아감이 우리의 정체성, 가면의 정체성 아닐까.

 

"내가 누군지 말해줄 사람은 누구냐?"

 

진실을 잃어버린 한 남자,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모르고 그렇게 20년을 산 것이다. 그러다 대사처럼 늙고 애처로운 신세가 되어서 그는 자신으로 돌아왔다. 거짓말 하는 법을 피하고 싶었던 대로 드디어 20년이란 세월을 잃고 자신을, 진정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 것이다. 아들인 태식의 진정한 아버지로 돌아온 것이다. 배우에서 아버지로 돌아오는 길은 지난하고 길었다. 소화하지 못했던 연기, 그 미완의 연기를 마쳤어야 하니까.

 

우리 모두는 이렇게 연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다른 사람을 흉내 내며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다가 아예 그 사람, 진정한 내가 아닌 가짜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나인 듯 내가 아닌 남으로 살면서도, 그것이 남인 듯 내가 아닌 남인 것을 모르고 나로 믿고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진정한 나를 찾지 못하고 살아가는, 착각 속에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의 모습이 나의 독재자다. 나는 진정 누구인가? 진정한 나 자신을 알고 있으면서도 진정한 나를 드러냄이 두려워 지금의 나로 살거나, 그냥 나로 믿으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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