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좌충우돌 유쾌한 영화 읽기-76- 5일의 마중, 잔잔하면서도 울컥하는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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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이 있다. 마음의 울림이다. 울컥함이 있다. 가족들의 진솔한 마음과 인간애가 있어서. 5일의 마중은 그렇다. 매 5일이면 오지 않는 사람, 아니 이미 와 있는 사람을 마중 나간다. 기억의 장난이든 운명의 장난이든 이미 옆에 있으나 없는, 이미 와 있으나 오지 않는, 그래서 늘 5일이면 마중가기를 평생 해야 하는 이들의 모습이 처절하게 안타깝다. 우리들 모두 내가 아는 너는 너가 아니다. 네가 아는 나는 나가 맞음에도. 너도 나처첨, 나도 너처럼, 옆에 두고도 알지 못하는 그 무엇, 이미 와 있으나 안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 무엇이 있지는 않을까? 담담하고 대담하게 그 무엇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트라우마, 확신이 없는 우리는 생의 어느 길목에서 입은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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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교수로 지식인층에 속하는 류옌스는 문화대혁명의 시기에 당국에 잡혀간 이후 소식이 없다.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그는 역사의 소용돌이의 희생양인 셈이다. 아무런 소식도 전할 수 없는 사상범으로 그는 긴 세월 가족과 소식 없이 지낸다. 그저 감옥에서 부칠 수 없는 편지를 쓰며 생활한다. 그렇게 감옥살이만 하던 그가 10년 만에 탈옥을 한다. 열차가 수시로 지나다니는 열차길 옆 후미진 곳에 숨어 지내다가 그는 집에 가려 하나, 집 근처에서 눈치를 보니, 이미 당국의 정보원이 그의 가족이 사는 빌라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가 집으로 돌아올 것을 알고 당국에서 이미 그를 다시 잡아들이려 정보원들을 파견한 것이다.

 

그의 딸 단단은 무용수다. 그녀는 공연에서 주연을 꿈꾼다. 이 두 모녀를 회유하여 루옌스를 잡으려 한다. 정보원은 류엔스의 아내 평리완과 그의 딸 딘단에게 그가 돌아오면 즉시 신고하라며 협박한다. 그의 아내와 그의 딸 단단은 생각이 서로 다르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돌아와도 신고할 생각이 없지만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조차 못하는 단단은 아버지의 존재보다 자신이 하고 있는 무용의 주연을 차지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루옌스는 집으로 돌아온다. 당국의 감시가 두려운 아내 펑리완, 중학교 교사인 그녀는 그를 집안으로 받아들이진 못한다. 그런데 그런 광경을 그의 딸 단단이 발견한다. 복도에서 방으로 들어가지도 못한 그는 벽보 한쪽을 찢어 철도 옆 육교 밑으로 나오라는 편지를 써서 현관문으로 밀어 넣고 사라진다. 이를 본 아내는 그를 보러가려고 먹을거리를 정성스럽게 준비한다. 반면 그의 딸 단단은 엄마가 아빠를 만나러 가는 것을 극구 반대한다. 그럼에도 평리완 그녀의 결심은 변함이 없다. 이제까지는 너를 위해 살았으니 이제는 남편이 우선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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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그를 만나러 간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육교 밑에 숨어 있는 루엔스, 그를 찾아 헤매는 펑리완, 그가 답답하다 못해 육교에서 나와서 아내의 이름을 부른다. 이때 이미 단단에게 제보를 받고 대기하던 공안요원은 그를 알아차리고 그를 잡으러 그에게로 달려간다. 결국 두 사람은 재회도 못한 채 헤어진다. 루엔스는 다시 감옥으로, 펑리완은 일상으로 돌아간다.

 

단단은 아버지를 다시 잡도록 정보를 제공했지만 주연자리를 얻지는 못한다. 대신 주연의 옆의 전사 역을 맡는다. 그녀는 춤 솜씨로는 최고라서 당연히 주연이지만 아버지가 사상범이라는 이유, 탈옥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미운털이 박혀 주연을 잡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의 정보를 주면 주연을 맡게 해주겠다는 정보원의 회유에 넘어가 아버지를 잡히게 만들었음에도 그녀는 공연에서 전사 역으로 연기를 마치고 만다. 그때부터 그녀는 무용을 접고 방직공장에 취직한다.

 

세월이 흘러 10년 후 문화대혁명도 끝나고 사상범들 모두 풀려난다. 그제야 집으로 당당하게 돌아올 수 있게 된 루옌스, 그를 마중 나온 건 그의 딸 단단이다. 그의 아내는 보이지 않는다. 단단을 따라가니 단단은 공장 기숙사 생활이다. 시간이 없어 사정 이야기를 듣지 못한 채 집에 돌아온 루엔스에겐 낯선 풍경들이다. 입구에서부터 가전도구까지 모두 글자 안내표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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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아내가 그에게 누구냐고 묻는다. 그가 접근하자 펑 아저씨냐며 그를 내친다. 영문을 알 수 없이 내쫓긴 그는 아내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당국의 배려로 근처에 허름한 거주 공간을 마련한 그는 딸 단단에게서 아내의 소식을 듣는다. 그가 다시 잡혀간 지 2년 후부터 기억상실증에 걸려 기억을 못하는 부분이 있다고, 단단이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도 그녀의 잘못을 기억하는 엄마가 집에 들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가 도착했을 때 아직 개봉하지 않은 편지, 내용은 그가 5일에 출소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편지의 5일, 어느 월인지는 없고 5일이란 날짜만 있었다. 그 편지를 단단이 엄마에게 전한 거였다. 그날부터 펑리완은 매 5일이면 그를 마중 나갔다는 것이다. 그의 이름을 크게 적은 팻말을 들고.

 

이제 루옌스는 아내의 기억을 되찾아 주려고 무진 애를 쓴다. 아내는 다른 것을 기억하면서도 루옌스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 그녀를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안타까움만 더하던 그가 그녀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의사에게 묻는다. 의사의 진단은 '데자뷔' 직역을 하면 ‘이미 본 것’이란 의미의; 현상이란다. 이를테면 처음 보는 것인데도 낯이 익은, 언젠가 본 듯한 느낌의 현상이다. 그의 아내가 그를 보는 시각이 그런 현상이란다. 그는 낯선 남자인 셈이다. 그런데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드는, 그녀의 입장에서는 그렇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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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기억을 되돌리기 위해서 루엔스는 그녀가 그를 되찾을 수 있도록 그의 옛 사진들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단단에게 앨범을 가져오라고 한다. 그런데 사진들마다 그의 얼굴이 있던 부분들은 모두 오려져 있다. 자신의 사진이 들어있는 사진은 한 장도 없다. 단단이 다 오려냈다는 것이다. 그렇게 20년 세월이 흘렀으니 펑리완은 남편의 사진조차 20년은 아니라도 한동안 못 보고 지낸 것이다. 그는 아내의 동창을 찾아 자신과 같이 찍은 사진 한 장을 어렵사리 구한다. 그 사진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하려하나 여전히 그녀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그녀가 남편이 치던 피아노를 수리하려고 한다. 공중전화로 죠율사를 부르는 것을 안 남편은 자신이 피아노 조율사인양 그녀를 방문한다. 그가 조율을 마치고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낯익은 곡을 연주한다. 기억이 살아오는 걸까, 뒤에서 다가온 그녀가 그의 어께에 손을 얹는다. 기쁨과 만감이 교차한다. 그가 그녀를 안는다. 두 사람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하지만 그뿐 안겨있던 그녀가 그를 밀어낸다.

 

세 번째 시도는 이전에 쓴 편지를 보내주기다. 한 박스 가득한 편지를 배달이 온 것처럼 하여 그가 그녀를 도와 운반해 준다. 그러고는 그는 그 편지를 읽어주는 이웃으로 행세한다. 평리완은 그 일을 즐거워한다. 그렇게 둘은 스스럼없는 관계로 지내면서도 그를 남편으로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녀 옆에 있는 것만으로 족해야 한다. 그는 답답하다. 해서 이번엔 그는 그녀에게 편지를 쓴다. 마치 감옥에서 쓴 것처럼. 그리고는 편지를 읽을 기회에 그 편지를 집어넣어 대신 읽어준다. 단단을 용서하고 집으로 들이라는. 그 편지 덕분에 단단은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세월이 많이 흘러도 그녀는 끝내 그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매월 5일이면 그는 인력거를 만들어 그녀를 태우고 그가 출소할 그 자리로 간다. 그렇게 또 10년이 흐른들 그녀는 그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저 좋은 이웃일 뿐이다. 아내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남편은 아내의 기억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이를테면 같은 자리에서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기다린다. 영화는 매 5일 찾아가는 그 감옥 앞 육교에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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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희생자인 개인과 가정의 아픔이 아주 진소하게 그려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영화다. 어떤 과장도 없다. 아주 사실적이다. 그러니까 드라마틱한 면이 없다. 억울함을 당한 이웃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처럼 어디에 가서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그러지도, 그런 시도조차 않는다. 그저 평범하게 살아간다. 당하면 당한 대로 살아간다. 시대가 그러했으니까,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런 식으로 당하곤 했으니까. 답답해 보이는 이들의 생활, 그게 소시민들의 삶이었다.

 

자신의 꿈을 위해 아버지를 고발해서 평생을 죄책감으로 살아가는 단단의 모습도 애처롭다. 그 죄책감 때문에 더는 부모 원망 안 하고 남은 삶을 이들을 위해 이들을 모시며 살아가는 모습이 요즘 아이들에 비추면 대견스럽다. 그런 그 아이를 탓하지 않고 너그럽게 용서하고 위로하는,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원망 한 마디 안하는 루옌스의 모습에서 진정한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또한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고 때로는 무례하게 그를 내치는 아내에게 원망 없이, 모든 것이 자기 때문에 그리 된 것이라며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녀를 위해 매 5일이면 그녀의 남편, 실은 자기가 자기를 마중 나가는 일에 동참하는 그의 넉넉한 마음이 눈물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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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 <오디세이아>가 있다. 그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여 10년,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데 10년, 20년 만에 집에 돌아간다. 물론 그 신화에서 오디세우는 일부러 자기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아내 페넬로페는 20년 만에 돌아온 그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오디세우스는 그의 적들을 물리치기 전까지 아내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 한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설정이다. 그럼에도 그의 개는 그를 알아차린다. 사람은 사람을 못 알아보고 개는 사람을 알아본다. 그것이 사람이며, 그것이 원초적인 부부지간 아닐까.

 

그럼에도 오디세우스와 그의 아내 페넬로페는 결국 서로 환희로운 재회를 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기다림으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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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배경을 떠올리며, 그 당시를 살았던 가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슬픈 가족사를 본다는 의미, 그런 의미로 접근하면 그저 현대영화라기보다는 고전을 한 권 읽는 그런 기분일 것이다. 영화나 소설처럼 과장되지 않은, 잔잔하면서도 울컥하는 울림이 있는 영화다. 사회와 가족사, 그리고 그 구성원들의 진솔한 모습과 인간애를 느낄 수 있다.

 

한편으로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우리 인간의 심리, 이를테면 피상적으로는 서로 잘 안다, 사로 가까운 사이다하면서도 내심으론 서로가 서로를 몰라도 너무도 모르는 인간의 페이소스를 보여주는 건 아닐까? 서로 지척에 두고도 서로를 기다린다. 서로에게 다른 기대를 가지고 있어서 우리는 서로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 그런 관계들이 얼마나 많을까. 마치 우리는 낯익은 사람들이면서도 어딘가 낯선 사람들로 이웃하며 살고 가족으로 산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마중하며 이렇게 산다. 서로가 서로에게 다른 기대를 하며 산다. 함께 살아도 다른 그 무엇을 기대하며 살기에 내가 바라는 너는 그 너가 아니고, 네가 기다리는 나는 네가 원하는 내가 아니다. 아무리 오래 함께 지낸들 함께 살아도 서로가 서로를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그런 사이로 우리 모두는 살아갈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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