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좌충우돌 세상읽기-16- 노인 되기의 두려움
오늘도 다양한 모습을 만나려 전철을 탄다. 전철에서 만나는 사람들,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또 하나의 나를 발견한다. 오늘도 그런 모습을 만난다. 닮고 싶은 삶을 만나고 피하고 싶은 삶을 만난다. 그리고 나의 미래를 만난다. 두려운 나를 만난다.
늙는 게 두렵다고 말하면 ‘나이 들면 움직이기 어렵다, 아픈 곳이 늘어난다, 성인병이 발생한다.’는 신체적인 이유 또는 생리적인 이유로 대부분 생각한다. 물론 충분한 이유다. 여러 불편한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그럼에도 사람도 동물인 이상, 생물인 이상 피할 수 없으니 기꺼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런 두려움은 기꺼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이와는 다른 두려움, 이성적으로 살다 본성적으로 변할까 나는 그게 두렵다. 전철을 타면 앉고 싶다. 주로 강의를 많이 하는 요즘은 전철을 타면 앉고 싶다. 때문에 전철을 타면 일단 앉을 자리를 엿본다. 자리가 없어 앉지 못하면, 누군가 내려 빌 자리를 눈여겨본다.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란 말이 있듯이 편안한 상태를 싫어할 사람은 없으니 그건 당연하다. 자리에 앉으려는 게 부끄럽다는 건 아니다. 체면 생각 않는 교양 없는 행동이 두렵다.
시내에 나갔다 들어올 때였다. 전철을 탔다. 자리가 없었다. 어느 자리가 날까 나름 눈치를 보아 적당히 자리를 잡고 섰다. 한참을 오다 종로3가역, 환승역이라 사람들이 내일 준비를 하면서 사람들이 내렸다. 자리를 잘 잡았다 싶었다. 내가 선 자리 앞에 두 자리가 비었다. 그리고 한 자리 건너 또 한 자리가 비었다. 충분히 앉을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잡아, 잡아, 잡아!”라는 외침이 들렸다. 무슨 소리지 하는 생각에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내가 선 곳에서 먼 뒤쪽 문에서 사람들이 채 내리기도 전에 할머니 한 분이 사람들 사이를 뚫고 들어오고, 뒤에 두 할머니가 따라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뒤에 따라 들어오는 할머니 두 분이 외치는 소리였다. 5미터는 될 법한 거리를 앞선 할머니 한 분이 슬라이딩 하듯 내 앞으로 훅 다가왔다. 그러더니 내 앞 자리에 앉으면서 옆자리엔 손수건을 한 자리 건너엔 가방을 놓았다. 그랬다. 자리 차지하기 위한 외침이었다.
영문 모를 일이 벌어진 현장, 멍하니 서서 앞에 앉은 할머니를 바라보니 마음이 영 불편하다. 속에선 상스러운 말이 불끈불끈 올라온다. 나뿐만이 아니다. 옆에선 사람들 역시 눈치가 안 좋다. 그렇다고 나이든 이들에게 뭐라 말도 못하고 속으로만 욕을 씹고 있는 눈치다. 나 역시 성인군자가 아니니 속에서 열불이 난다. 내려다볼수록 설치고 들어와 뻔뻔하게 앉아서 수다를 떠는 할머니들이 너무 얄밉다. 영 불편하다. 겉으로 드러내 욕은 못하고 내려다보며 속으로 욕을 퍼 대다 자리를 옮긴다.
자리를 옮겨서도 마음이 영 안 풀린다. 열 받는다. 남의 일 같지 않다. 저 모습이 나의 내면의 모습인 것 같아 나 자신이 부끄럽다. 불과 길어야 한 시간이나 두어 시간 차지할 그 자리를 탐하여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추하게 일그러뜨리는 모습을 보면 괜히 씁쓸하다.
나 역시 늙어간다. 나도 늙으면 저리 될까, 그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득한 느낌, 늙는 게 두렵다. 지금은 교양 있는 척, 지성인 인양 산다만 나이 들면 나도 저렇게 교양 없는 사람으로 변하는 건 아닐까 두렵다. 사람은 누구나 편하고 싶을 테고, 편함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 늙을수록 더 편하고 싶을 텐데 저리 변할까 두렵다. 늙는 게 두렵다. 총기를 잃는 것도 힘을 잃는 것도 무섭지만 품위를 잃는 게 더 두렵다. 언젠가 내 미래의 초상화도 저들 모습처럼 일그러질까 그럴까 저들을 닮을까 벌써 서글프다.
추함과 아름다움, 선함과 악함, 아주 다양한 내면을 갖고 있는 사람, 그 다양한 모습들 중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생활로 배어나는 경우는 많다. 일상의 한 단면이지만 그 모습들 속에 그 한 사람의 인격이 들어 있다. 아니 품격이 들어 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보다 사람을 더 잘 이해하고, 세상사는 지혜를 알아서 보다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반대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모두 그런 건 아닐 테지만, 나이 들어가면서는 일단 총기가 흐려진다. 자신도 모르게 아집이 늘어난다. 편견은 더 쌓인다. 때문에 남을 용서하고 이해하기는커녕 고집만 늘어난다. 누구나 예외 없이 그런 삶의 길을 걸어야 한다.
이것이 늙어감의 증상이지만 젊은이들은 노인에게 그 이상을 기대한다. 보다 나은 품격을 기대한다. 때문에 나의 눈에 비친 그 모습이 애교보다는 추하게 보인다. 저 모습이 나의 미래의 모습인 것 같아 씁쓸하다. 내가 걸어가야 할 모습, 내 미래의 자화상 같아 슬프다.
품격, 인생의 어느 변곡점에서 잃어버릴 품격의 변곡점, 그 기한을 연장하려 노력하며 살아야겠다, 참 곱게 나이 들고 싶다, 나이 들어간다는 건 옹고집을 키우는 과정이 아니라, 욕심의 크기만 늘려가는 게 아니라, 사람다운 품격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라는 걸 보여주며 살았으면 한다. 많지는 않지만 참으로 곱고 아름다운 노인들도 얼마든 있다. 그 분들을 닮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