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좌충우돌 세상읽기-27- 널 만난 건 참 다행이야!
“널 만난 건 참 다행이야!”라는 말과 “하필이면 널 만날 게 뭐람!”의 사이에 내가 있다면?
‘남들은 저렇게 잘 되는데, 왜 나한테는 안 좋은 일만 일어나는 거야?’라거나 ‘하필이면 이런 일이 나한테 닥치다니.’라거나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하는 말의 공통점은 ‘하필이면’이란 의미다.
불행은 하필이면에서 출발한다. 하필 그곳에 내가 있었으므로, 하필 내가 그 시간에 있었으므로, 하필 그 사람을 만났으므로, 하필이면 그때 그곳에 그 사람을 만났으므로, 또는 그 일을 했으므로 그런 안 좋은 일이 일어난 것으로 인식한다. 그것을 불행이라 믿는다. 이런 모든 것이 알고 보면, 객관적으로 판단하면 나의 선택에 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선택에서 비롯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시간 탓, 장소 탓, 사람 탓을 할 때 거기 불행이 있다.
이처럼 불행은 어떤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마음에 달려 있다. 같은 일이라도 누군가에겐 다행한 일이지만 누군가에겐 하필이면의 일이다. 결국 불행도 행운도 일어난 결과보다는 그 상황이나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행운을 부르는 사람, 자신이 행운아라고 믿는 사람이 행운으로 받아들이는 일도, 불행을 부르는 사람, 자신을 불운아라고 믿는 사람은 불운으로 받아들인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같은 일, 같은 대상도 다르게 인식된다. 고로 불행한 사람은 계속 불행을 부르고, 행복한 사람은 계속해서 행복을 부른다.
나는 불행한가? 불행하다 생각하면 나는 게으른 사람이다, 부정적인 사람이다, 나는 불행을 부르는 사람이라는 자기 고백일 뿐이다. 왜냐하면 불행, 불행이란 살면서 일어난 일을 그대로 방치한 상태를 이르기 때문이다.
힘들게 사는 이, 일반적으로 불행한 사람, 운이 없는 듯한 사람, 그에겐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묻지 않아도, 아니 오히려 묻기 전에 그는 먼저 자신은 운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세상을 원망한다. 이웃을 원망한다. 가족을 원망한다. 그의 결론은 세상과 사람을 잘 못 만났다고 탓한다. 그는 자신이 게을러서 자신의 상황을 개선하지 못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정하기는커녕 그 사실조차 모른다. 때문에 그는 게으름의 대명사이다.
그는 자신을 정말 운이 없다고 믿는다. 자신은 나름 최선을 다했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때가 좋지 않았다, 때를 잘 못 만났다, 사람들이 자신을 돕지 않는다, 돕기는커녕 방해만 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믿는다. 때문에 그는 실제로 세상이 자신의 편이 아니며, 자신의 주변 사람들 역시 자신의 편은커녕 앞길을 가로막는 방해꾼이거나 방해요소로 생각한다. 그는 오만하지만 자신의 오만을 인정하기는커녕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거나 자신의 게으름을 정당화한다.
나는 운이 없는 사람인가, 아니면 당신은 운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나나 당신은 게으를 뿐인데, 오만할 뿐인데, 세상을 부정적으로 볼 뿐인데, 모든 일을 부정적으로 해석할 뿐인데, 부정적인 세상 통역기를 고칠 생각은 않고 남 탓, 세상 탓만 하고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운이 좋든 안 좋든 좋은 기운을 끌어내는 것도 내 몫이요. 복을 짓는 것도 내 몫이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생각은 당장 바뀌지 않더라도 ‘하필이면’이란 말을 쓰지 않는 대신 ‘다행히도’라거나 ‘참 다행이야’라는 말을 쓰자. 그렇다.
“당신을 만난 건 참 다행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