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좌충우돌 세상읽기-31-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영광도서 0 1,078

실존을 아주 좁은 의미에서 보면 나의 실존이고, 넓혀 보면 실존이다. 실존을 정의함에 있어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란 명제가 간다하면서도 대단한 함의를 가진 문장이라 할 수 있다. 이 문장의 함의를 풀려면 우선 두 개념을 따로 놓고 풀어야 한다. 즉 실존의 개념과 본질의 개념을 각기 풀이한 다음, 두 개념간의 관계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실존은 그야말로 나를 중심에 놓는다. 때문에 우선 내가 존재한다. 생각하는 나, 감각이 있는 나, 느끼는 나, 결론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나가 있다. 나의 존재 조건은 살아 있다는 전제다.

 

다음으로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죽었다는 것과 견주어야 한다. 여기서 시간을 만난다. 인식하는 시간, 내 존재를 확인 가능한 시간, 때문에 내가 내 의지대로 최소한의 무엇이든 말하거나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은 지금을 의미하며 다른 말로 살아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반면에 그렇지 않은 시간은 죽은 시간이다. 죽은 시간은 시간이 있다고 말하나 나는 호가인 가능하지 않은 시간들로 지나간 시간과 다가오는 시간 둘 다이다. 따라서 나의 실존은 이제 지금 존재하는 나, 지금 생각하는 나, 지금 언행이 가능한 나로 정리한다.

 

그리고 이제 지금 존재하는 나가 나의 존재를 확인 가능한 공간이 남는다. 지금이라는 시간성에다 지금 존재하는 실재성을 증명할 수 있는 공간은 바로 여기밖에 없다. 조금 전에 지나온 장소, 조금 전에 있었던 장소에 나의 존재를 보여줄 수는 없다. 조금 전에 나의 그 무엇을 보여줄 수 있었으나 거기에 지금의 나를 보여줄 수는 없잖은가. 따라서 이제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나를 얻는다. 이것이 실존의 개념이다.

 

본질은 무엇인가? 본질은 나를 존재하게끔 하는 핵심이다. 이를 알려면 나의 정체성을 우선 물어야 한다. 나는 어디서 왔느냐, 나는 무엇이냐를 묻는다. 이를 위해선 나 자신만으로는 알 수 없다. 나와 견주어 다른 사람과 나의 관계를, 인간과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를 읽어야 한다. 결국 나를 안다는 것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이른다. 나란 존재는 인간 이하도 인간 이상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질의 문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나를 있게 한 존재인 인간, 그것은 나 이전에 이미 있는 존재들의 합이다. 인간의 본질은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에 속한 나에게 인간이란 개념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나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한 것이 인간의 본질이니까. 그런데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한다. 이 말은 본질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인간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앞서 나란 무엇인가가 중요하다는 의미이며, 내가 무엇인가보다 중요한 것은 나의 실존이란 의미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나에게 어떤 의미이며,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없는 시간이나 장소는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는 본질적인 질문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나를 알고, 나를 인식하게 하는 지금이란 시간을 알고, 그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공간은 여기임을 안다는 것이 실존의 상황으로 지금 여기에 있는 나에 이른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실존의 의미다. 때문에 실존주의는 이것저것 따진 후 지금 여기에 있는 나를 가장 우선시한다. 하여 실존주의는 내가 무엇을 했느냐 하는 과거보다 우선 지금 나는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미래보다 역시 지금 나는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과거란 기억에만 살아 있을 뿐 이미 지나간 시간이기 때문에, 미래란 내가 그 시간에 살아 있으리란 보장이 없는 시간이기 때문에 죽어 있는 시간들이다. 따라서 지금이란 시간만이 나의 시간이다.

 

그러니 죽은 시간들인 과거에 얽매여 살아 있는 지금의 시간을 헛되이 보냄은 어리석다는 것, 죽은 시간일 수도 있는 미래를 위해 지금을 희생한다는 것도 어리석다 한다. 까뮈는 말한다. “죽은 미래를 위해 생생하게 살아 있는 현재를 희생하지 말라.” 톨스토이는 말한다.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가 하는 일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시간은 사용 가능한 지금이라고. 결론은 카르페 디엠이다.

 

살아 있는 시간인 현재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머지는 나의 몫이 아니다. 실존주의자들은 말한다. “과거란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 나의 것이 아니다. 미래란 것도 나에게 주어지란 보장이 없으니 나의 것이 아니다. 때문에 내가 무엇을 했느냐 중요하지 않다. 무엇을 할 것이냐 중요하지 않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만 중요하다.” 나의 전 존재의 바로미터는 바로 현재이다. 나는 지금이란 시간을, 지금 글을 쓰는 일을, 지금 글을 쓰는 이 공간을 사랑한다. 고로 나의 이 실존은 가장 중요하다. 나는 행복하다. 고로 나는 현명하게 잘살고 있으며 나의 실존은 나의 본질에 앞선다. 현재를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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