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좌충우돌 세상읽기-34- 나는 정의로운가?

영광도서 0 1,127

정의란 말이 화두로 자주 오르내린다면, 그만큼 정의롭지 못하다는 반증이다. 정의가 자리 잡은 사회에선 정의는 무의미하다. 때문에 정의로운 사회일수록 정의란 단어는 의미를 잃고 다른 말로 가치를 잃고 단어 자체가 오르내리지 않는다. 반대로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선 정의를 부르짖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는 갈등 없는 평화를, 불안 없는 질서를 원하기 때문이다.

 

유사 이래 인간은 늘 정의를 추구한다. 서로 갈등이 없는, 서로 대립이 없는, 그래서 서로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율배반적인 존재라서 정의로운 사회에선 정의를 깨려 하고, 불의가 넘치는 사회에선 정의를 얻으려 한다. 인간의 역사는 늘 이처럼 파과와 질서, 질서와 파괴를 거듭하는 이율배반의 역사를 반복한다. 그러니까 헤겔의 정반합의 변증법은 역사는 증명한다.

 

정의, 적어도 인류가 부족이나 씨족 사회를 지나 국가체제를 이루고 산 이후, 인간은 정의의 문제를 화두로 삼는다. 정의는 권력을 얻으려는 자나 집단에선 보검과도 같은 훌륭한 도구이다. 일단 정의라는 칼을 잡으면 칼을 잃은 상대는 무기력하게 무릎을 꿇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 앞에선 늘 ‘나는 정의고 너는 불의’라는 이분법으로 서로 정의를 주장한다.

 

이러한 정의에서 과연 누가 정의일까? 결국 정의는 민중이 정의한다. 어느 쪽을 누가 더 많이 지지하느냐가 정의의 기준이다. 정의의 기준, 그건 완벽할까? 완벽이란 말은 절대적 기준을 말하고, 한 번 규정된 것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전제이다. 그러나 유사 이래 변하지 않는 것은 거의 없으니 절대적 기준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완전한 정의는 없다. 때로는 강자의 논리로 정의를 규정하고, 상황논리로 규정한다. 때문에 어제의 정의는 더 이상 정의는 지금은 정의가 아닐 수 있다. 어제의 정의는 그들이 내린 정의요, 지금의 정의는 지금의 주체세력이 내린 정의다. 어제의 정의는 자칫 정의이기는커녕 불의로 바뀌고, 오늘의 정의 또한 내일도 정의라는 보장도 없다. 민중의 마음, 즉 민심은 고정불변이 아니라 언제 어떻게 다른 옷으로 갈아입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진정한 정의는 곧 민심이다. 민심을 얻으면 그것이 정의이다. 그렇다고 절대적 정의는 아니다. 나의 마음 하나도 그 정의를 일부를 이루고 있는데, 내 마음도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진정한 정의, 정의를 추구하며 살고 싶다면 늘 겸손할 도리밖에 없다. 내가 생각하는 지금의 정의는 자칫 나의 오만한 판단, 나만 옳다는 아집의 결과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신파극 심순애가 있다 치자 .심순애는 이수일을 사랑한다. 적어도 김중배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로 안겨주기 전까지는 그랬다. 심순애의 마음은 변한다. 이수일을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할 수 있다. 그러나 장래를 생각하면 암담하다. 이수일은 무일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순애는 이수일을 버리고, 김중배를 선택한다. 그러면 심순애는 불의인가?

 

순수한 사랑을 외치는 입장에선 심순애는 불의다. 그러나 사람이 사랑만 먹고 살 수 있느냐 묻는 현실론자에게 심순애는 정의다. 이처럼 같은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개인의 정의는 사뭇 다르다. 그런데 이러한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모여 정의를 정한다. 정의는 민심이다. 민심을 얻는 자, 그가 곧 정의이다. 이 정의는 절대적이지는 않다. 언제든 변할 개연성을 갖고 있다. ‘인심은 조석변’이란 말처럼 때로 쉽게 변한다. 그러니까 진정으로 정의를 원한다면 늘 겸손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정의는 지금의 정의일 뿐, 상황적 정의일 뿐이다. 그래 마음 편하게 생각하자. 너도 옳다니 너도 옳다. 나도 옳다 생각하니 나도 옳다. 다만 서로를 인정하자. 나는 절대적으로 옳고 너는 절대적으로 옳지 않다 규정하지 말고, 서로를 인정하려는 겸손한 태도를 취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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