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좌충우돌 세상읽기-37- 걸레처럼만 살 수 있다면
욕의 대부분은 비유로 구성되어 있다. 아무리 상대가 밉더라도 욕은 부정적이기 때문에 직접 표현하기 어려운 이유도 있고, 또한 욕은 직접적인 표현보다 에둘러 표현하면 더 자극적이거나 더 인상적이기 때문에 효과를 노리는 이유도 있다. 따라서 욕은 대부분 창의적이며 비유적인 표현이 많다.
그런 욕들 중에 걸레 같은 0란 욕이 있다. 욕의 대부분 따지고 보면, 아니 역설로 보면 오히려 긍정적인 경우가 많듯이 이 말도 풀어보면 사실은 긍정적이 면이 더 많다. 이를테면 사람치고 걸레만한 일을 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걸레는 더러운 것을 닦아서 깨끗하게 하는 도구로 쓰인다. 어떤 바닥을 지나든 유리창을 지나든 걸레가 지난 자리는 깨끗하다. 얼룩도 사라지고 먼지도 사라진다. 걸레는 이처럼 어떤 것을 깨끗하게 한다.
다른 대상을 깨끗하게 하는 역할을 하면서 더러워지지만 그것은 걸레 자체의 의도는 아니다. 다른 대상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결과다. 깨끗한 바닥이나 벽을 만든 후 걸레는 도구로 쓴 사람에 의해 빨린 다음 다시 깨끗한 상태로 돌아간다. 이처럼 걸레는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일에 쓰인 후 다시 깨끗한 상태로 돌아가기를 거듭한다. 그러니 만일 인간이 걸레처럼만 살 수 있다면 훌륭한 삶이라 할 수 있다.
걸레가 지나간 자리는 늘 깨끗하지만 사람이 지난 자리는 오히려 쓰레기가 남거나 오물이 남거나 청결하지 못한 것들이 남는다. 그렇다면 걸레는 오히려 인간보다 나은 존재다. 적어도 인간보다 나은 도구로 쓰인다. 때문에 걸레 같은 0이란 표현은 욕이라기보다 칭찬에 가깝다. 걸레만도 못한 0라면 인간과 거의 동등한 가치의 표현이니 그런 데로 들어도 괜찮다. 걸레는 존재하는 동안은 주인이 빨아주기 때문에 청결을 유지한다. 하지만 인간은 인간의 죄를 스스로 청결하게 할 수 없다. 걸레는 인간이 청결하게 하고 인간은 신만이 청결하게 씻어줄 수 있다.
때문에 걸레 같거나 걸레만도 못하거나는 욕으로 쓰이기 부적절하다. 역설적으로 들으면 욕은 오히려 축복에 가깝다. 그러니 걸레만도 못하다, 걸레 같다는 욕을 들어도 그다지 기분 나빠하지 말자. 욕에 민감하면 할수록 이성을 잃고 반응이 빠를수록 욕은 더 만연하다. 그러니까 욕을 역설로 받아들여서 상대를 부끄럽게 하는 여유, 그것이 승자의 여유다. 욕을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여유로 상대를 부끄럽게 만들라는 의미이다.
걸레, 걸레처럼만 살 수 있다면 그는 행운아다. 걸레의 과거를 보라. 걸레는 걸레이기 이전에 수건이다. 수건은 역할을 다한 다음 버림받는다. 그것들 중 운 좋은 수건만 걸레로 선택 받는다. 때문에 걸레처럼만 살 수 있다면 그는 인생 1라운드에서의 역할을 끝내고도 인생 2라운드에서도 여전히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니 걸레 같은 존재는 운 좋은 사람이란 뜻이다.
게다가 걸레의 역할을 보라. 수건은 한 개인의 땀을 닦는 데 또는 물기를 닦는 데 쓰이는 도구라면, 물론 힘들지 않은 역할을 한다만, 걸레는 바닥을 닦거나 벽을 닦는 역할을 한다. 이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 공동의 공간을 깨끗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비록 하는 일은 더럽고 험한 일이지만 깨끗하게 하는 본질은 그대로인 것이 걸레의 일이다. 그러므로 일의 결과로 보면 걸레가 하는 일이 수건의 하는 일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 의미가 있다. 사적인 차원을 넘은 공적인 일을 하는 게 걸레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걸레처럼만 살 수 있다면 적어도 그는 축복 받은 삶, 운 좋은 삶을 살고 있다는 반증이요, 걸레만도 못하다면 평균적인 사람으로는 살 수 있다는 의미이니, 욕 들어도 좋다.
나는 살고 싶다. 걸레처럼. 더러운 세상을 깨끗하게 하는 존재, 깔끔한 일을 마친 후에도 쓸모 없이 버려지는 존재보다 여전히 다른 존재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로 살고 싶다. 나는 걸레처럼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