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좌충우돌 세상읽기-39- 우리 만남은 우연일까, 운명일까?

영광도서 0 1,114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람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노사연이 부른 노래 <만남>의 가사의 앞부분이다. 우연과 운명, 단어가 있다면 그런 상황은 분명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어떤 것은 운명이고, 어떤 것은 단순한 우연일 뿐이다. 우연과 운명, 어떤 상황이 우연이고, 어떤 상황은 운명일까?

 

어떤 것은 우연이고 어떤 것은 운명이라고 정의하기란 아주 애매하지만 그럼에도 굳이 정의한다면 적어도 내가 선택 가능한 상황은 우연이라 말한다. 우연이 없다면 인간은 굳이 애써 무언가를 하려 애쓸 이유가 없다. 인간을 만나는 일, 인간과 사귀는 일, 이런 모든 상황은 알고 보면 모두 선택의 연속일 뿐 운명은 아니다. 나의 선택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지나치게 운명을 신봉하면 스스로의 삶에 무책임할 수밖에 없고, 자신의 삶을 무겁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노사연의 노래처럼 만남을 운명이라 치부해 보자. 그러면 순간순간이 모두 의미를 갖는다. 그 순간들은 의미를 갖기 때문에 무게를 얻는다. 그러면 순간순간은 소중하다. 그 순간순간은 다름 아닌 지금을 잊게 한 과거의 시간들이다. 과거의 시간들이 나를 여기에 잊게 한 것은 맞다. 그러나 과거의 순간들에 너무 의미 부여를 하면 지난 일들에 발목 잡혀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앞으로의 날들 역시 운명의 연장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 만남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의 자유의지는 사라지고 운명만 남는다. 운명만 남는 인생은 삭막하다. 그저 삶에 저당 잡혀 살아지는 대로 살 수밖에 없다.

 

반면 순간순간을 다만 우연으로 치부하면 자유롭다. 내가 세상에 온 것조차 어떤 의미에서는 우연의 산물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만남 역시 우연한 선택이고, 우연한 선택의 결과로 나는 세상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우연의 산물이다. 무엇을 선택하든 선택은 선택의 결과를 부르지만 그 결과가 운명은 아니다. 우연의 결과들일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연을 받아들이면 가볍다. 만남 자체에 무게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남은 의미가 없다. 의미가 없다는 것은 비어 있다는 뜻이므로 가벼울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너와 나의 관계는 가벼운 상황이다. 크게 의미 부여할 이유가 없다. 단지 우연한 상황에 불과하므로, 굳이 무게를 부여할 것은 없다.

 

하나하나 따지면 우연이란 없는 것 같지만 다시 생각하면 우연이 맞다. 하나하나 의미 부여를 하여 신의 뜻으로, 신이 만든 운명으로 생각하면 나의 삶의 몫은 극히 적다. 나의 책임도 극히 적다. 운명인데 내가 개입할 몫이 얼마나 있을 것인가? 내 삶의 선택의 몫을 넓히면 삶은 우연의 산물이므로 내 삶을 내가 만들어갈 수 있다. 반면 내 삶의 선택을 줄이고 신의 몫을 넓히면 내가 만들어갈 내 몫은 극히 적다. 그러므로 나는 운명보다 우연을 믿는다. 나는 나를 선택하고, 내 삶을 선택하고, 내 현재를 선택하고 내 미래를 선택한다. 신은 나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고, 그 대신 그 선택의 결과 역시 너의 몫이라 말한다. 고로 너와 나의 만남은 우연한 선택일 뿐 운명은 아니다. 오늘의 선택의 결과들이 내일의 너와 나의 만남의 모습일 뿐이다. 나는 내 삶을, 내 만남을 선택한다. 내일의 나를 만들기 위해 선택한다. 고로 나는 신이 부여한 운명이 아니라 내가 내 운명을 만들며 산다. 그것이 신의 뜻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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