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좌충우돌 세상읽기-45- 그 신사는 아주 멋졌다.

영광도서 0 540

세상 살면서 작고 소소한 사기를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별것 아니라도 사기를 당하고 나면 찜찜하다. 찜찜하다기보다 영 마뜩찮다. ‘어쩜 내가 이렇게 멍청하지’ 싶게 창피하기도 하고, 되돌릴 수 없는 게 안타깝기도 하고, 잃어버린 손실이 아깝기도 하지만 이미 지나간 버스처럼 되돌릴 수 없다. 그럴 땐 속으로 사기 친 분은 듣지도 못할 쌍욕을 퍼 대는 밖에 도리가 없다.

 

이십여 년은 족히 된 것 같다. 출판사에서 마케팅 업무를 맡고 있을 때였으니까. 무척 날씨가 쾌청한 날이었다. 발걸음도 가볍게 강남지역 거래처에 가려고 나섰다. 한강을 바라보는 언덕에 근무하는 회사 사무실이 있었던 터라 언덕을 내려와 전철을 타려고 마포역으로 내려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유독 깊은 역내로, 전철 승강장으로 내려갔다.

 

마음은 가벼웠다. 처리할 업무도 전화로 어느 정도 조율한 터라 어려울 일도 없었고, 담당자를 만나 간단하게 일처리만 하면 되었다. 평상시나 다를 것 없이 승강장에서 전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주 멋진 아저씨가 다가와 말을 건다. 검은 양복에 휜 셔츠, 물방울무늬의 빨간 넥타이, 아래위로 정장차림이다. 게다가 우측 팔엔 깔끔한 검은 외투를 걸고 있는데 아주 잘 어울린다. 딱 한눈에 아주 멋진 신사다. 그냥 멋진 신사를 넘어 교양이 있고 지적이며 범상치 않은, 아주 깔끔한 인상을 준다.

 

다가온 그가 깔끔한 매너로 말을 건다. 강릉에 있는 고려호텔 사장인데, 서울에 출장을 오느라 공항에 차를 세워두었다, 서울에 와서 아차 실수로 지갑을 잃은 것 같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시청 앞에 내려서 택시비를 지불하려고 지갑을 꺼내려는데 없었다, 간신히 주머니에 남은 동전으로 전철까지는 타고 여기까지 왔다면서 일어난 상황을 간략하고도 명쾌하게 설명한다.

 

말투도 그렇거니와 한 마디 한 마디가 군더더기 없다. 외모와 차림새뿐 아니라 말씨도 아주 신사다. 자신의 상황을 설명한 그는 말을 잇는다. 문제는 돌아갈 버스비도 없어서 그러니까 버스비를 좀 빌려달라고 한다. 내가 거부감을 보이지 않고 어느 정도 마음이 동했음을 파악한 건지 그는 종이를 꺼내더니 거기에 우선 자신의 회사명을 적는다. 그냥 한글로 코리아 호텔이라 적지 않고 영어로, 그것도 필기체로 능숙하게 갈겨쓴다. 그 밑에 자신의 이름을 적는다. 거기에 자신의 031로 시작하는 전화번호를 적는다. 돌아가면 반드시 돈을 송금하겠으니 꼭 전화하란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혹시 강릉에 오실 일이 있으면 한 번 들리세요. 사모님과 놀러 오세요.”한다.

 

그가 내인 유려한 서체의 쪽지를 받아들었다. 주저 없이 나는 지갑을 꺼내어 동전만 빼고는 내가 지니고 있던 지폐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강릉에 돌아갈 차비로는 충분하고도 남을 돈이었다. 아까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빌려주고도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언젠가 강릉에 놀러가 대우를 받을 생각, 아내에게 멋진 추억을 만들어줄 생각을 하니 들뜨기까지 했다.

 

전혀 아무 생각 없이 하루의 일을 마치고 사무실에 들어가서 경리 업무를 맡은 직원과 그날의 일을 마감하면서 그날 있었던 그 일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직원이 “아이고! 전무님 사기당하셨어요.”한다. 즉각 나는 “아냐! 그 사람이 적어준 쪽지 볼래? 봐! 필체가 완전히 엘리트라니까. 아주 멋진 신사더라고.”라고 반박한다. 그녀가 “줘 보세요.”하고 쪽지를 나꿔챈 그녀가 쪽지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건다. 스피커폰으로 전환한 전화기 속에서 들려오는 음은 즉각 신호음이 갈 필요도 없이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국번이오니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걸어주세요.”였다.

 

“것 봐요.”하며 해맑게 바라보는 그녀의 말에 얼마나 머쓱하던지.

 

우선 그렇게 보기 좋게 당한 내가 머쓱했다. 그러고 나선 그렇게 큰돈은 아니었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았던 그 돈이 무척 아까웠다. 점심 몇 끼 값은 되는 돈인데, 쇠고기 두세 근은 살 수 있을 돈인데 그 생각을 하니 속으로는 쌍욕이 나왔다. 돌이켜 복기하면 의심할 대목이 한두 개가 아닌데 그걸 전혀 의심하지 못하다니, 강릉공항이 있긴 한가에서 말이긴 하지만 과잉친절로 놀러오라는 등의 제안을 할 때 합리적인 의심을 할 만한데도 그렇지 못한 나를 그 사기꾼이 비웃었을 생각하니 정말 화가 났지만 직원 앞에서는 그냥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그러니 누구를 원망하랴. 지나고 생각하면 그 모든 잘못은 나의 몫인걸. 물론 사기 치는 놈이 더 나쁘긴 하다만 모든 문제의 근원은 나의 어리석음에 있는 것이니까. 어리석음의 근원, 그건 혹시나 하는 반대급부를 바란 나의 욕심 때문이 아니었으랴. 정말 거지라면 선뜻 그렇게 거금을 내줄 나는 아닐 터이고, 그의 외모에 속은 데다 반대급부를 생각한 나의 욕심이 더한 탓이니, 어리석음의 이면엔 욕심이 도사리고 있다는 교훈을 얻은 것으로 위안을 삼는 도리밖에.

 

아주 멋진 신사, 나도 외투가 있어서 그 사람처럼 팔에 깔끔한 양복차림에 외투를 팔에 걸쳐 보지만 그런 폼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사기 아무나 치는 거 아니다.이제는 억울한 생각도, 조금은 창피하다는 생각도, 얄밉다는 생각도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퇴색된 사건이지만 지금도 그때 그 사건은 생생하게 영상처럼 기억한다. 지금도 5호선 마포역을 지나노라면 늘 그 사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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