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좌충우돌 세상읽기-46- 확증편향이란 말 앞에서
“난 영원한 네 편이야!” 이렇게 말하면 이 말을 듣는 상대편은 무척 기분 좋아한다. 이성에게 이 말을 건네면 상대는 작업을 거는 달콤한 말로 듣는다. 서로 좋아하는 사이에서 이 말은 보다 낭만적인 말로 듣는다. 위의 세 문장은 내가 생각하는 바를 마치 진리인 양 확정한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나의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인다. 그렇지 않다면 기분 나쁘게 받아들인다. 이처럼 같은 문장 같은 상황이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같은 의미로 바뀐다. 때문에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 안에 갇힐 수 있다.
영원한 내 편, 연인 사이에선 듣기 좋은 이 말이 일반적 정서로 옮겨가면 무서운 말로 발전한다. 이러한 관계는 자칫 이분법적이거나 적대적으로 확장할 수 있다. 단어 자체가 그러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으니, 내 편이 있다는 전제는 네 편이 있다는 전제이기 때문이다. 내 편이란 단어만 놓으면, 네 편이란 단어만 놓으면 좋은 의미의 단어로 존재하지만, 내 편과 네 편으로 함께 놓으면 딱 보아도 갈등의 조짐을 느낄 수 있다.
이를 정리하면 내 편과 네 편은 이미 갈등조장을 잉태하고 있어서, 이 말을 사회적 또는 정치적으로 옮기면 확증편향이란 무서운 단어를 낳는다는 뜻이다. 확증편향의 사전적 정의는 “자신의 가치관, 신념, 판단 따위와 부합하는 정보에만 주목하고 그 외의 정보는 무시하는 사고방식”을 말하며, 동시에 영어로는 Confirmation bias로 “원래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신념을 확인하려는 경향성”이다.
말로는 만물의 영장이란 인간은 알고 보면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극히 일방적 존재이다. 한번 방향을 잡으면 특별한 동기가 없는 한 그쪽만을 지향하는 성향이 있다. 긍정적으로 보면 그것이 소신이거나 신념일 터이지만 부정적으로는 똥고집이거나 억지로 발전한다. 이렇게 일정한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성질이 심리에 들어앉으면 확증편향이 되어 도무지 다른 방향은 보지 못한다. 보지 못하면 보려는 노력이라도 할 터인데 전혀 그럴 생각조차 못한다. 이때부터 확증편향이 자리 잡아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하고, 그것만을 진실로 믿는다. 그것만이 옳다고 믿는다. 때문에 내 편은 모두 옳고 네 편은 모두 틀리다로 받아들인다. 옳고 그름으로 발전하면 내 편과 네 편은 낭만적인 의미를 잃고 갈등조장의 씨앗인 말로 변한다.
이처럼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가려 보는 확증편향엔 우선 통계학적 확증편향이 있는데, 이는 통계적 추론에서, 가설을 확증하는 쪽으로 치우치는 일종의 인지적 편향을 말한다. 이런 인간의 인지적인 편향을 보정하기 위해선 자신의 가설을 반증하려 노력하여야 보정할 수 있다. 내 편에 우호적인 성향을 일부러라도 반대편의 성향이란 가설을 세우려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확증편향으로 있을 우려를 보정할 수 있다.
또한 심리학적 확증편향은 의사결정자가 자신의 주장을 확증하는 증거에 더 무게를 두고, 더 잘 알고, 더 적극적으로 찾는 경향을 말한다. 이런 경향을 갖는 순간 그는 자신의 주장을 확증하기 위해 자신에게 유리한 또는 주장을 확정할 수 있는 정보나 증거를 찾는다. 때문에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알고 싶은 것만 알려고 하는 데에서 출발한 확증편향은 근거자료 수집에서도 선택편향으로 발전한다.
이렇게 되면 이제 그는 돌이킬 수 없이 더는 다른 것을 보려는 생각조차 않는다. 때문에 이쯤 되면 내 편은 무조건 옳다. 상대는 무조건 그르다. 상대의 생각은 알 생각도 없고 알 이유도 없다. 때문에 그는 한쪽만 본다. 더는 못 본다. 편향성이 문제인 것은 사회를 갈등의 장으로 만들어 도무지 화해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는 데 있다.
예컨대 한 사람이 만일 음식의 편향성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문제를 인식한다. 그럼에도 그는 편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더니 영양의 불균형으로 비만이 되거나 신체의 질병을 얻는다. 이런 가설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쉽게 편향의 감정을 갖는다. 그리곤 이내 확증편향으로 자리한다. 이쯤 되면 사회에서의 내 편 내 편은 사회를 양분화하여 갈등하게 만든다.
지금 우리 사회가 딱 그 꼴이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이 확증편향은 공고할 대로 공고하여 치료 불가능한 상태지만 해결될 기미가 없다. 내 편의 옹호를 받는 이들이 양분화하여 적당히 그것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그저 침묵한다. 이도 저도 아닌데 자칫 어떤 한 편을 들면 그쪽으로 오해를 받고 낙인찍히기 때문이다.
네 편 내 편이란 낭만적 단어는 이제 확증편향의 무서운 단어로 우리 사회를 떠돌며 전운이 감돌게 한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어느 편이냐고 심리적으로 묻는다. 그리곤 그에게 어떤 프레임을 씌우려 한다. 그러면서도 심각성을 모른다. 네 편이란 말과 내 편이란 말이 둘로 갈려 있는 한 더는 넓은 세상을 볼 수 없다.
내 안을 벗어나지 않는 한 너를 알 수 없듯이. 그럼에도 나는 너무 편협하다. 내 편만 바라보며 그를 따른다. 그만 옳고 그를 욕하거나 비난하는 사람은 그르디. 나는 너에게 누구 편이냐 묻거나 너에게 어떤 프레임을 씌우려 한다. 너는 내 편이냐? 아니면 다른 편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