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좌충우돌 세상읽기-54- 잡초를 닮은 나는 잡가요!
누군가 나에게 직업을 물은 적이 있다. 잠깐의 망설임 없이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 “잡가” 였다. 내가 말한 의도는 딱히 뭘 내세울 만한 뭔가가 없어서였다. 농사꾼으로 시작하여 공장노동자, 직장인 또는 회사원, 시인, 수필가, 소설가, 여러 번 작업을 바꾸기도 했지만 동시에 겸했으니 나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딱히 규정할 수 없었다. 순수하게 학생인 적이 없었고, 한 가지 직업으로 산 적이 없었다.
지금도 딱히 똑 부러지게 잘하는 것도 없다. 강의를 한답시고 하지만 강의 역시 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글쓰기와 읽기, 인문학과 신화, 그때그때 다르다. 그만큼 잡다한 것에 욕심이 많아서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요청하는 데 따라 이것저것하다 보니 특기는 없고 잡다한 것들만 있다. 때문에 특정 분야의 대가도 되지 못하고 늘 잡가로 산다.
잡가! ‘여러 잡다한 일로 살아가는 사람, 또는 주류에 속하지 못하고 비주류로 살아가는 사람, 작가를 낮추어 부르는 말, 이 정도로 잡가를 정의하면 사전에 들어갈 법한가?’ 나는 바로 이 셋에 고루 들어간다. 이렇게 말해도 저렇게 말해도 나는 잡가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나는 나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긍정으로 나를 받아들인다.
원래 스타는 한 가지 줄기를 잡아 똑 부러지게 잘해야 한다는데, 이젠 그럴 때도 지난 것 같아서, 위로 삼아 ‘스타란 스스로 타락하는 사람’을 이르는 거라는 말로 나를 위로한다. 사람마다 나름의 취향이 있을 게다. 그런 점에서 나는 잡을 좋아하는 것뿐이다. 이에 만족하여 살면 그뿐이다. 무엇을 하든 무엇을 하며 살든, 나 자신을 긍정하는 자세, 그것만이 나를 위로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한들 내가 그를 따를 수 없으니 나는 나로 산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 있다면 오늘에 감사하고, 내일쯤은 오늘보다 나은 나이기를 바라는 소박한 소망으로 하루하루를 살면 만족할 만하지 않은가.
지금 잡가라고 언제나 잡가는 아니다. 가령, 들에 잡초가 있다고 하자. 잡초는 다만 주인을 제대로 못 만나 이름을 얻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다 어느 날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이름을 얻으면 더는 잡초가 아니다. 번듯한 이름 하나 얻어 잡초의 세계를 떠나 이름을 얻고 보호를 받는다. 야생화들 중에도 아주 흔하거나 인간의 눈에 발견되지 못한 것들은 그냥 야생화다. 그러다 누군가의 눈에 들면 야생화는 나름의 꽃 이름을 얻는다. 이들 역시 이름을 얻으면 보호를 받는다. 이처럼 사람의 눈에 든 식물들은 더 이상 흔한 잡초란 이름 대신 화초란 이름을 얻기도 한다. 그렇게 사랑을 받는 것은 좋으나 더는 질긴 생명력을 잃는다. 때문에 나는 잡을 좋아한다. 누군가의 보호를 받지 않으나 생명력이 강한 잡초, 특별한 이름을 갖지 않아 딱 무엇인지 몰라 보호 받지 않고 사는 잡초, 보호 받지 않는 그 자유로움을 난 좋아한다.
잘난 시인이 아니어서, 잘 쓰는 수필가가 아니어서, 제대로의 소설가도 아니어서 딱히 이 중에서 무엇이다 규정할 수 없어서 잡가이니 장르를 넘나드는 즐거움이 좋다. 솔직히 말해 잡가로 먹고 살기 힘들어서 강의를 한다. 시 쓰기 강의를 해 달라, 아니면 자서전, 수필, 소설 쓰기 강의를 해 달라, 고전 읽기는 어떤가, 인문학은 어떤가, 신화는 어떤가, 강의마저도 잡하게 한다. 그래도 나는 좋다.
잡다하게 하려면 다양하게 공부할 수 있으니까. 잡다하게 여러 일을 하니 잡다한 생각을 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남들이 잡 놈이라고 욕하지 않으니 다행이다만, 때로는 잡 놈이란 욕을 들은들 어떠랴.
“넌 누구냐?”
“난 잡 놈이요. 아니 잡가요. 아니 잡상인이요. 특별한 이름을 갖지 못했으나, 그 덕분에 이렇게 비 퍼붓는 날이면 비를 흠씬 맞는 잡초들을 보시오. 화초야 주인이 주는 물이나 맞지 않소. 나는 그런 자유로움이 좋소. 끈질긴 생명력이 좋소. 잡가는 잡초의 다른 말이니, 나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잡가로 살겠소. 난 눈에 띄는 이름은 없으나 나는 내 이름을 아오. 그대에게 잡가지만 나는 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