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좌충우돌 세상읽기-57- 줄탁동시啐啄同時와 적자생존適者生存

영광도서 0 467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새의 世界다. 새롭게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世界를 깨뜨려야만 한다. 새는 神을 향해 날아간다. 神의 이름은 아프락사스(Abraxas)라 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은 이들은 전체 내용은 잘 몰라도 이 문장은 대부분 기억한다. 이 문장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줄탁동시와 통하기도 하고 엄격히 해석하면 줄탁동시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줄탁동시란 의미는 줄(啐)과 탁(啄)이 동시에 이루어짐을 뜻하나 윗 문장은 줄은 있으나 탁은 없는 형상이다. 깨어남도 스스로요, 알을 깨고 나옴도 스스로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미안> 전체 내용을 보면 줄탁동시의 의미에 닿는다. 간절히 원하면 세상만물이 돕는다 하니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의 모티프를 여기서 읽을 수 있고, 또한 아프락사스를 향한 발돋움은 줄탁동시에 다름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鏡淸常以啐啄之機開示後學. 曾示衆說, 大凡行脚人, 須具啐啄同時眼, 有啐啄同時用, 方稱衲僧. 如母欲啄, 而子不得不啐, 子欲啐, 而母不得不啄.: 경청(鏡淸)은 항상 줄탁지기(啐啄之機)로 일찍이 대중들에게 말하기를 “행각자(사방을 떠도는 중)은 반드시 줄탁동시의 눈을 가져야 하고 줄탁동시의 씀을 가져야 비로소 승려라 할 수 있다. 마치 어미가 밖에서 쪼려고 하면 새끼가 안에서 쪼지 않을 수 없고, 새끼가 안에서 쪼려고 하면 어미가 밖에서 쪼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중국 송대에 기록된 <벽암록>에 나오는 줄탁동시는 어미 닭이 알을 품어 병아리를 만들기까지의 과정에서의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 인위적인 부화는 인간이 조작한 부화로 알을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게 하여 부화하는 방식이지만, 자연적인 부화는 어미닭이 그 모든 과정을 온전히 맡는다. 어미닭은 스스로 알을 낳되 일정한 곳에 낳는다. 알이 일정량 모이면 어미닭은 더 이상 알을 낳지 않는다. 대신 먹기 자체를 최소한으로 하면서 거의 종일 알을 품는다. 알속에선 따뜻한 온기 속에 흰자와 노른자가 생명체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알 안에서 골격을 갖춘 생명체는 18일 가까이 지나면 밖으로 나오려 신호를 보내기 시작한다. 밖으로 나가겠다고 위쪽으로 신호를 보낸다. 이를 줄이라 한다. 감을 잡은 어미닭은 20여 일쯤에 나오려는 생명체를 도와 드디어 아래쪽으로 부리를 향해 알을 깨뜨린다. 이를 특이라 한다. 이처럼 안에서 줄 밖에서 탁, 이 둘이 동시에 이루어져 병아리는 탄생한다.

 

이를 상징적으로 비유했으니, 줄은 스스로 무언가를 향한 몸부림이자 궁함이라 할 수 있으니, 이는 행각자라 할 수 있다. 스스로 행하고 깨달은 자만이 바깥세상으로 나올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스스로 살려는 의지, 스스로 다른 세계가 있음을 깨달음, 스스로 바깥세상으로 노오려는 움직임, 이 셋이 갖춰지지 않은 사람은 다른 세계로 나갈 수 없다는 의미 아닐까?

 

이 셋으로 간절히 바깥세상을 원하면 그는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그 안에 머문다? 머물기는커녕 죽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알 속엔 언제까지 있을 수 없으니 어느 정도 기한이 지나면 환경의 변화로 죽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알속에 있는 자, 다시 말해 변화를 시도하지 않고 현실에 머무는 자는 필연적으로 그 세계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으니 지금의 상황에서 나가려는 몸부림을 쳐야만 한다. 그 간절한 몸부림만 있으면 어떻게든 도움을 받든 우연이든 밖으로 나올 수 있는 통로를 발견할 수 있다.

 

만물은 유전한다는 말처럼 세상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한다. 정지된 것은 없다. 우리 자신 변하지 않는 것 같지만 어제의 나, 그제의 나, 과거로 과거로 돌이켜보면 나는 갓난아이에서 어린아이로, 청년으로 중년으로 변하고 변해왔다. 그 시간 속에 나만 변한 게 아니라 환경도 삶의 조건도 변했다.

 

이처럼 시간이 지나면 나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는 변한다. 모든 환경도 변한다. 환경 변화에 따라 나도 변하지 않으면 나는 곧 소멸에 휘말려 사라질 수밖에 없다. 곧 적자생존의 의미다. 모두가 앞으로 나가고 있으니 멈춤은 멈춤이 아니라 퇴보일 수밖에 없다. 적어도 남만큼은 나가야 멈춤이다. 남보다 조금 빨리 나가면 진보이다.

 

그러니 탁은 나중문제이고 우선 나는 줄이다. 지금의 세계, 지금의 지식수준, 지금의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보다 새로운 것을 원하며 그것을 얻으려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나는 생존한다. 조금은 힘들어도 그 힘듦을 즐기는 마음, 그것이 줄을 향한 유쾌한 삶의 몸부림이다. 지금의 알 속에서 나가야 산다는 깨달음, 기어이 지금의 알을 깨고 나가려는 의지, 드디어 연약하지만 내 삶의 부리에 온힘을 모아 알을 깨는 몸부림, 이 줄에 하늘이 돕든 하늘이 보낸 누군가 돕든 탁이 있으리니, 줄탁동시는 곧 진인사대천명이다. 간절히 줄하라, 탁이 임하리라. 줄탁동시에 이르려면 변하는 환경에 적음해야 살아남는다. 곧 줄탁동시 적자생존이다.

 

딱따구리는 하루에 일만 번을 부리로 쪼아대어 하루 삶의 먹거리를 해결한다. 그렇게 자신의 부리를 단련시킨다. 나 비록 연약하지만 내 삶의 부리로 세상을 쪼련다. 힘들다, 어렵다, 고민이다, 하지 않으며 이 모두를 즐기는 마음으로 쪼아대는 내 삶의 몸부림은 얼마나 유쾌한가! 새로운 아침을 위한 몸부림으로 춤을 추자. 유쾌한 삶의 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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