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좌충우돌 세상읽기-59- 데미안이 묻는다. 너는 너를 아는가?
<데미안>을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 아니 읽지 않은 사람들도 기억하는 문장은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새의 世界다. 새롭게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世界를 깨뜨려야만 한다. 새는 神을 향해 날아간다. 神의 이름은 아프락사스(Abraxas)라 한다. (Der Vogel kämpft sich aus dem Ei. Das Ei ist die Welt. Wer geboren werden will, muss eine Welt zerstören. Der Vogel fliegt zu Gott. Der Gott heißt Abraxas. )” 이다. 이 문장은 이 책이 끌고 가는 중요한 줄기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알 속에 있는 새, 새를 가두고 있는 알, 새가 날아가려는 곳의 아프락사스신이란 등식이다.
그런데 알 속에 있다는 새는 안주하는 새가 아님을 전제로 한다. 알 속에서 나가려 한다. 이 전제라면 이 새는 적어도 개성이 있는 새, 다시 말하면 다른 새들은 알 밖으로 나가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데 비해 적어도 이 새는 알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새란 의미이다. 지금의 알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세계를 지향하는 이 새의 조건으로는 간절함을 요구한다. 이 새가 밖의 세계로 나가기 위한 간절함이 있기 위해서는 우선 바깥 세계는 지금의 세계보다 나은 무엇이 있다는 각성이 있어야 한다. 즉 깨달음이다. 깨달음이 있어야 일단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전제이다. 이 깨달음이 없이는 의지조차 없을 테니까. 그러면 깨달음이 있어야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는 전제이다. 또한 적어도 바깥세상은 지금의 이 알 속보다는 낫다는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 이 각성 또는 깨달음, 영지주의자들은 구원은 그노시스, 즉 깨달음으로 얻는다고 본다. 그렇다면 헤르만 헤세는 이 책의 하나의 모티프로 영지주의에서 시작함을 알 수 있다. 이제 새는 단순한 새가 아니라, 바깥세상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새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이제 깨달은 새란 무엇일까를 생각할 차례다. 헤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성서의 카인과 아벨 사건을 이야기한다. 성서에서 인류 최초의 살인을 상징적으로 이야기한 사건이다. 사건의 요약인 즉, 카인은 농사를 짓는 자, 아벨은 양 치는 자, 둘은 각자 준비한 제물로 신께 번제를 드린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든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카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다. 이에 화가 난 또는 질투에 눈 먼 카인은 아벨을 죽인다. 그러자 신은 카인을 그곳에서 쫓아낸다. 카인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한다. 그러자 신은 그에게 표식을 주어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게 하는 표를 주셨으니, 카인을 죽인 자는 일곱 배의 저주를 받으리라는 증표라고 성경은 말한다.
헤세는 이때에 카인이야 말로 깨달은 새로 설명하고자 한다. 신은 카인에게 인을 쳤는데, 이 표지는 낙인이 아니라 보호를 의미하는 표지라는 설명이다. 죄를 지었으나 보호를 받는 카인, 카인이 죽인 아벨, 카인은 어떤 사람을 의미하고, 아벨은 어떤 사람을 의미하는 걸까? 물론 전통적으로 아벨은 선한 사람, 카인은 악인의 상징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헤세는 이를 달리 해석한다. 기존의 그 무엇, 낡은 세계의 상징으로 아벨을 설정하고, 그걸 깨달은 자로 카인을 설정한다. 결국 둘은 낡은 알 속에 존재하는 자들로, 카인은 깨달은 자이다. 그는 새로운 세계로 나가려는 자의 상징으로 헤세는 설정한다.
그러면 이제 새와 알의 관계에서 알을 깰 자는 카인과 같은 존재임이 드러난다. 이러한 존재는 아무나가 아니라 주인공이 될 자격이 있는 자이다. 각성한 자, 이 세계의 부조리함을 깨달은 자라는 등식이다. 이쯤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인물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라스클리니코프, 카뮈의 <이방인>의 뫼르소를 만날 수 있다. 좀 더 나아가면 니체의 초인을 만날 수 있다. 이들은 기존의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를 가졌거나 솔직함을 가진 인물들이다.
알이란 무엇일까에 가기 전에 우선 헤세의 새는 깨달은 자라는 것은 이제 명확하다. 어떤 구원이든 구원을 향해 움직이려는 새요, 지금 자신이 어떤 알이라는 좁은 세계에 있다는 것, 이 알은 벗어나야 할 (정신적)공간이라는 것, 깨야 할 알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자임을 알 수 있다.
깨야 할 알, 벗어나야 할 알, 이를 모든 새가 깨닫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알 속엔 많은 새들이 있다. 그 새들은 대부분 그대로 있기를 원한다. 다만 깨달은 새만이 밖으로 나가려한다는 전제로 헤세는 말한다. 깨달은 새는 카인으로 대별되는 이방인이나 초인이다. 이들은 모두 살인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알을 깬다는 것은 살인이다. 내 속에 죽여야 할 것들을 뜻하기도 하고 아니면 피상적인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이 아침에 나는 나에게 묻는다. 나는 살아 움직이려는 새인가라고. 도대체 나는 어떤 알에 갇혀 있는지는 알고 있을까? 편견에 빠져서 나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확증편향에 빠져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속 좁은 인간은 아닐까, 도무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하긴 한 걸까, 나는 지금 도대체 어떤 알 속에 있는 걸까? 나는 나에게 묻는다. 이 물음의 답을 얻는 순간 나는 깨달은 새가 되어 내가 갇힌 알의 정체를 어렴풋하게라도 짐작할 수 있을 터이다. 그나마 존재의 의미를 깨달으려 사고하는 나는 다행이다. 그걸 모르고 저만 옳다고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인데.
나는 무엇을 아는가? 몽테뉴가 던진 질문이다. 나는 안다. 내게 깨드려야 할 것들이 많다는 것을. 그것들을 깨뜨려야 나는 새로운 나를 만날 수 있다. 거창하게 말하지는 않더라도 내가 깨뜨려야 할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그것이 헤세가 말하려는 알일 테니, 알 알 알?
“알은 곧 새의 世界다. 새롭게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世界를 깨뜨려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