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좌충우돌 세상읽기-60- 지금 나는 어떤 알 속에서 웅크리고 있을까?
성서 요한복음에는 바리새파 니고데모가 예수께 묻는 구절이 있다. 니고데모는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예수께 묻는다. 예수는 거듭나야 한다고 답한다. 그러자 니고데모는 어떻게 어머니의 배에 다시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느냐고 묻는다. 예수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답한다. 예수는 거듭남을 상징적인 의미로 말씀한 것인데 니고데모는 사실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거듭남, 다시 태어남이다. 부활이란 원래 있었던 것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이라면 이는 변하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곧 중세의 헤브라이즘으로 죽어야 했던 고대의 헬레니즘이 다시 살아난 시대 르네상스가 부활이듯이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거듭남이란 그런 정도의 르네상스가 아니라 새로운 모습으로의 탄생이다. 이전 것은 지난 것이라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의 재탄생이다. 차원이 다른 모습으로의 재탄생이다.
그런 면에서 니고데모가 예수께 들은 거듭남과 헤르만 헤세가 말한 ‘알을 깨고 나오는 새’의 상징은 일맥상통한다. 어떤 세계, 아니 지금의 세계를 깨고 나가기, 이 세계를 깨고 나가야 한다는 명제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로, 이는 피상적으로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라 영적인 모습은 아니라도 마음의 모습, 마음가짐이라 할 수 있다.
“알은 곧 새의 世界다. 새롭게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世界를 깨뜨려야만 한다.”는 문장에서 새롭게 태어나려는 자는 각성한 자로 세상에서 흔히 이방인으로 취급하는 자로, <데미안>에서 비유로 거론한 카인, 예수의 십자가상에서의 솔직담백한 왼쪽의 강도처럼 현재의 세계의 관습이나 낡은 마음을 벗고자 하는 이방인을 일컫는다. 그들은 지금의 진부하고 가식적인 세계를 깨뜨리려는 자들로 <죄와 벌>의 라스클리니코프, 니체의 초인에 버금간다고 하겠다.
이제 헤세가 말한 세계란 무엇일까? 싱클레어는 어렸을 적부터 두 세계를 인식한다. 자신의 집이 밝음에 속한다면, 바깥 동네는 어둠의 세계다. 그런데 밖에서 보면 밝음의 세계는 안으로 들어오면 역시 두 세계로 나뉜다. 부모님과 누이들은 밝음의 세계인데 비해 하녀와 하인들의 세계는 저급한 언어가 난무하는 어둠의 세계이다. 문제는 그의 집의 가정부 리나는 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두 세계를 오간다. 싱클레어의 가족과 있을 때는 점잖은 말투로 밝음에 속하지만 저들의 세계로 돌아가면 저급한 말의 세계에 속한다. 싱클레어는 그 세계를 인식한다. 그런 그는 학교에 가면서 프란크 크라머를 만난다. 그의 이름은 곧 범죄 유발자란 뜻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싱클레어는 그를 만나면서 악의 세계의 거짓말을 배운다. 거짓말은 도둑질을 만든다. 그는 이렇게 어둠의 세계를 체험한다. 그가 그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나오도록 돕는 인물은 다름 아닌 데미안이다. 소크라테스가 언급한 내면의 신 다이몬의 변형이다. 내면에 잠재한 선한 나와의 만남을 의미한다. 곧 싱클레어가 현실적인 나 자아라면 데미안은 내면의 자아이다. 그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순간이 알을 깨는 순간이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만나면서 새로운 내면의 세계를 접한다. 그렇게 성장하면서 그는 이처럼 선의 세계와 악의 세계를 체험한다. 현실의 잡다한 체험을 알아간다. 그가 그 과정에서 만나는 부모님과 신부님은 법전을 들고 금지를 명하는 초자아인 슈퍼에고라 한다면 알폰스 베크처럼 그에게 향락을 가르쳐주는 존재는 욕망적 자아인 이드에 다름 아니다. 그는 이번엔 진하고 적나라한 향락의 세계에 빠져든다. 그러한 향락에서 그를 구한 건 베아트리체인데, 그녀는 실제 이름이 아니다. 그 역시 그녀의 이름을 모른다. 우연히 거리에서 먼발치로 만난 그녀를 그는 상상으로 품을 뿐이다. 정신적인 사랑의 위치에 놓고 그녀를 숭배한다. 덕분에 그는 방탕의 생활에서 사색의 생활, 독서의 생활로 변하면서 그 세계에서 벗어난다.
그 다음에 그는 전직 목사 피스토리우스를 만난다. 그가 생각하는 세계와 일맥상통하는 전직 목사이자 음악가인 피스토리우스의 와의 만남으로 그의 정신세계는 보다 탄탄한 기초를 다진다. 그렇다면 피스토리우스는 그를 안내하는 현자의 위치에 있다.
이어서 그가 만난 여인이 그가 늘 궁금해 한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이니, 에바는 원초적인 인류의 고향에 있는 대모의 상징이다. 선의 자녀 아벨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악의 자녀 카인의 어머니이기도 한 이브의 이름의 변형인 에바, 그러니 에바는 편협한 어머니가 아니라 모든 인류의 어머니이다.
<데미안>에서 우리는 싱클레어의 성장과정을 만난다. 그 과정에서 싱클레어가 나이 듦에 따라 만나는 사람들, 각기 다른 사람들은 그가 만나는 세계의 상징임을 알 수 있다. 그 세계들은 어쩌면 능동적으로 세계를 바꾸려하지 않아도 저절로 바뀌는 세계들이 대부분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시간의 가로축과 세로축을 지나면서 저절로 변한다. 아동기를 지나고 사춘기를 지나고 성인이 되는 것처럼, 사람은 모두 변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 세계를 의식적으로 깨려고는 않는다. 당위적으로 그 세계를 만나고, 그 세계 속에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인으로 성장한다. 그러니까 헤세가 말한 깨야 할 세계는 단순히 그런 세계를 말하지 않는다. 단순한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세계를 제대로 인식하고, 무엇을 깨야 하는지를 아느냐의 물음이다.
그가 말한 세계, 그건 깨야 할 세계로 아무나가 만나는 세계가 아니라 인식의 세계이다. 지금의 세계는 누구에게나 같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이 세계는 좁은 세계다. 깨드려야 할 편협한 세계다. 더는 쓸모없는 낡고 병든 세계, 진부한 세계, 불합리한 세계 곧 부조리의 세계이다. 지금 내가 속한 세계는 이처럼 진부하고 낡고 쓸모없는 세계임을 너는 아느냐고 헤세는 묻는다. 당대의 낡은 유럽의 문제를 제기한 헤세처럼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어떠한가? 낡고 진부한 세계인 당대의 유럽은 결국 양차대전을 겪으면서 구태를 벗고 새로운 세계로 변혁되지 않았던가? 세계가 확 바뀌려면 전쟁이 필요하듯, 국가가 바뀌려면 혁명이 필요하듯, 개인인 나가 바뀌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희생하여 내면화하여 온전한 싱클레어가 되듯, 내가 아니면 네가, 그렇게 깨뜨려야 할 세계는 무엇일까? 그래 나는 옳다. 너도 옳다. 우리 모두는 옳다고 말하자. 일단 이렇게 인정하고 너만 너의 세계만 깨라고 고집을 부리거나 떼를 쓰지 말고 우선 내가 옳다고 믿은 나의 세계의 결점부터, 진부함부터 발견하자. 제일 먼저 깨뜨려야 할 세계는 다름 아닌 나의 편협한 세계,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그릇된 이 세계이다. 소크라테스는 “너의 다이몬을 알라!”고 말한다. 헤세는 말한다. “빛과 어둠을 동시에 품은 싱클레어여 너의 내면의 데미안의 목소리를 들으라.”라고. 진정한 나를 알려는 사람이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고, 진정한 나를 만난 사람은 자신이 갇힌 알을 인식한다. 인식한 그는 그 알을 깨드리려 한다. 그는 타인의 알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알을 인식한다. 그는 이제 그 알을 깨뜨리려 한다. 인식한 그는 용기만 낸다면 그 알을 깰 수 있다.
“너 역시 마찬가지다. 너는 알고 있다. 네가 편견의 세계에서 확증편향으로 네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려한다는 것을. 그러면 너는 아프락사스를 향해 날아갈 수 없다. 자 용기를 내자! 남의 세계를 그르다 말고 너의 세계를 깰 수 있는 솔직함을 먼저 가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