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좌충우돌 세상읽기-61- 데미안이 만나라는 아프락사스여 안녕!

영광도서 0 551

“친애하는 싱클레어, 우리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 야. 그 신은 신이며 동시에 악마지. 자기 안에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 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어. 아프락사스는 자네의 생각 그 어느 것도, 자네의 꿈 그 어느 것도 반대하지 않아. 이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게. 하지만 자네가 언젠가 흠 없이 정상적인 사람이 되면 이 신은 자네 곁을 떠날 거야. 자네 곁을 떠나서 자신의 생각을 담아 요리할 새로운 그릇을 찾아보겠지.”

 

피스토리우스가 싱클레어에게 한 말 속에도 나오는 아프락사스, 이 신을 찾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들로, 자신을 위해서만 무언가를 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자기희생을 각오한 숭고한 사람들을 이른다. 이들은 지금의 알을 깨뜨리려고 한다. 알을 깨고 나온 이들은 다른 세계를 향한다. 어느 세계? 바로 아프락사스를 향한 비상이다. 이들의 최종목적인 아프락사스, 이 신은 통합의 신이다. 세상의 모든 것, 즉 사람들이 갈라치기 한 온갖 선, 온갖 악, 온갖 추함, 온갖 아름다움 이 모두를 품은 신이 아프락사스다. 크게 보면 선과 악 둘이지만 세분하면 아주 많은 것들, 아파락사스는 그 모두를 품고 있으니, 그 숫자를 365로 나눈다. 때문에 신의 이름 자체가 ΑΒΡΑΣΑΞ(아브라삭스)로 글자 하나하나에 부여된 수를 조합하니 365이다. 즉 Α(알파)는 1로 세 자이니 3, Β(베타)는 2, Ρ(로)는 100, Σ(시그마)는 200, Ξ(크시)는 60이니, 이를 합한 수가 365, 365가지의 잡다한 내면의 모습을 다스리는 신이 아프락사스다. 인간은 이 모두를 하나하나 쪼개어 네 편 내 편으로 나눈다.

 

아프락사스는 이 모두가 자신의 것, 자신의 자식들이니 이 모두를 감싸 안는다. 어느 하나 내치지 않고 모두 인정한다. 인정하니까 다스림이 가능하다. 때문에 이 신은 진정한 신이다. 모든 인간을 위한 참 신이다. 용감한 자, 각성한 자는 바로 이 신을 향해 올라간다. 이들이 알을 깨려한 목적, 그 알을 깨고 나온 목적인 바로 이 신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이니, 이들은 진정 인류를 위해 싸우는 이들이다.

 

예컨대 짜라투스트라의 신 선의 신 아후라마즈다는 악을 이해할 수 없다. 제 안에 선만 있으니 어찌 악을 이해하겠는가. 악을 멀리만 하는 존재가 악을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니 선을 가진 좋은 신으로 믿지만 외통수의 신 아닌가. 악의 신 아히리만 역시 마찬가지다. 악의 신은 악만 존재할 뿐 선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에게 아름다움은 악이다. 아름다움의 기준이 다른 신, 정의의 기준이 다른 두 신은 늘 대립한다. 요즘 벌어지는 선악의 논쟁처럼, 정의의 논쟁처럼.

 

카인은 악, 아벨은 선으로 나눈 채 서로 정의롭다 외친다. 그만큼 이 세계는 짜라투스트라의 종교 즉 조로아스터교에서 한 발도 나가지 못한 채 편 가르기를 한다. 이 논쟁의 원인도, 논쟁의 끝장도 그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이분법으로 나눈 세계를 그들은 오히려 즐긴다. 그러면 확실한 자기편이 생기기 때문이다. 나는 옳다. 그러니 너는 그르다. 나를 옳다고 믿는 편은 선이다. 그들이 내 줄에 선다. 나는 그것으로 족한다. 이렇게 서로 편 가르기를 이어간다. 이를테면 진부한 세계요 낡은 세계요, 부조리한 세계다. 그럼에도 이들은 그 좁디좁은 우물 속에서 아귀다툼을 벌인다. 이렇게 낡을 대로 낡은 세계를 그들은 모른다. 아니 알면서도 모른 체 한다. 지금 이대로가 좋으니까. 그러니 그들은 정의를 가장하고 있으나 정의을 위해서 아니라 자신의 안일, 자신의 무리의 안일을 원할 뿐이다.

 

진정 정의를 추구하는 자는 이제 그 알을 깨고 나온다. 그리고 나아간다. 아프락사스를 향하여. 아프락사스 안에는 온갖 선만 있는 게 아니라 온갖 악이 있다. 물론 선과 악은 인간들이 편의 상 나눈 기준에 불과하지만. 사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란 기준은 누가 만들었는가? 전쟁에 전쟁을 이어 교세를 확장한 이슬람교에선 전쟁에 나간 남자들은 수없이 죽는다. 그러니 남자는 턱없이 부족하다. 종족보존을 위해서라도 일부다처제는 필연이었으니 이를 악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다만 상황에 따라 시대에 따라 적자생존의 원리에 의한 숱한 인간의 행위들을 이분법으로 이것이다 규정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렇게 규정한다는 것 자체는 어쩌면 어리석은 일 아닌가. 때문에 아프락사스는 위대하다. 이 모두를 아우르고 있으니. ]

 

싱클레어는 소위 사람들이 권하는 선의 사회에 속한 적도 있었고, 사람들이 악이라고 규정한 쾌락에 빠져 지낸 적도 있었다. 때문에 그는 이것도 이해하고 저것도 이해한다. 때문에 그는 아프락사스를 향한다.

 

예수는 말한다. 아니 욕한다. 그렇게 고고한 행동의 소유자들, 아주 반듯하게 생활하는 사람들, 성경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정하여 살아가는 사람들, 곧 아주 바른생활 맨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꾸짖는다. 그들은 겉은 바른생활로 포장되어 있으나 속에는 오만이 가득 차 있어서다. 반면 항상 죄인이라고 고개를 숙이고 다니는 이들 세리들에겐 관대하다. 그들은 스스로 겸손하기 때문이다. 이 둘을 하나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두고 말씀하신다. “여러분 줄 죄 없는 자부터 돌로 이 여인을 치시오.”

 

누가 누구를 불의하다고 손가락질 하는가? 누가 누구를 불의하다 나는 정의롭다 하는가? 그들은 바리새인에 다름 아니다. 자신들의 감춘 부끄러움이 드러날까 두려워 오히려 그것을 감추려고 상대에게 그런 악의 프레임, 불의의 프레임, 그 어떤 프레임을 씌우려 전전긍긍한다. 무엇이 정의인가 무엇이 불의인가, 그렇게 불의와 정의로 나누었다 치자. 네가 불의로 점찍은 사람을 진정으로 양심을 걸고 돌로 칠 수 있는가?

 

이제 데미안과의 여행은 이 걸로 끝낸다. 그러면서 내 마음의 아프락사스를 만난다. 이 낡음의 세계를 깨고 통합의 신, 모두를 아우르는 신 아프락사스를 향해 날아가자고 외친 헤르만 헤세의 당시의 세계나 지금의 세계는 전혀 다를 바 없다. 가만 들여다보면 내 안엔 너무나 많은 선과 악이 득실거리는데. 아니 365개는커녕 그 이상의 악한 것들이 내 안을 득실거리는데, 너의 정의로 따지면 나는 얼굴조차 들 수 없는데. 그러면 너는 네 안에 선만 품고 있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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