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좌충우돌 세상읽기-63- 넓이는 세상에서, 깊이는 내 안으로

영광도서 0 553

나에게 행복할 조건이 있긴 한가, 이 물음은 보다 확장하여 광의적으로 물으면 인간에겐 행복한 조건이 있나, 이 물음에 다름 아니다. 세상의 모든 물음은 곧 나의 물음으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나에 관한 철저한 물음의 본질은 인간의 본질을 묻는 것이고, 나에 관한 질문으로 내 존재의 답을 얻었다면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답을 얻은 것이다. 때문에 모든 질문에 답은 내게 있으며, 인간을 아는 넓이와 깊이 모두 내게 있다.

 

내가 어떤 질문, 아니 그 이전에 내가 어떤 관심을 갖느냐는 나를 아는 시작이고, 그 관심으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면 답은 있다. 내 안에 있다. 물론 그 답은 정답을 이르는 것은 아니다. 내 나름의 답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왜냐하면 그것에 관해 질문을 던지지 않았으면 그것은 내 안에서 살아나지도 않는다. 내가 관심을 가지니 그것은 내 안에서 답을 찾아 나온다. 알고 보면 세상 모두는 내 안에 있다. 내 안에 있는 것을 얼마나 많이 발견하느냐, 그것은 나에게 달려 있다. 그러니까 깊이와 넓이 모두 내 안에 있다는 의미이다.

 

넓이, 내가 무엇에 관심을 가졌다 하자. 관심은 앎을 위한 출발이다. 관심은 질문을 하게 만들어 끝내 답을 찾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의 관심은 하나를 알게 하고, 하나를 알면 하나의 끝은 다른 관심을 불러온다. 그런 식으로 끝은 끝을 부른다. 그렇게 질문과 답을 반복하면서 넓히면 서서히 앎의 지평은 넓어진다. 넓이는 곧 내 안에서 출발하여 내 안에 차곡차곡 쌓는 결과물들이다.

 

그런데 아는 것 같으나 아는 게 아니다. 이는 넓이는 얼추 확보했으나 깊이가 없다는 의미이디. 알고는 있으나 설명할 수 없다면, 알고는 있으나 이해할 수 없다는 그건 앎이 아니다. 넓이는 충분히 넓혔으나 깊이를 갖지 못했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진정한 앎은 넓이와 깊이를 가진 것을 말한다.

 

넒이, 그것은 세상에 관심을 갖는 만큼 충분히 넓힐 수 있다. 세상에 관한 호기심들, 호기심들로 인한 질문들, 질문을 가지고 알아보기, 이 단계를 거쳐 나는 많은 세상을 알아보고, 알았다고 말한다. 곧 넓이는 세상을 향한 관심이고, 세상을 알아감이다. 넓이는 세상에서 배운다.

 

그러나 자꾸 넓히기만 하면 쓸모없는 그것이 없다. 그것을 쓸모 있게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넓힌 것을 쓸모 있게 하기, 그것을 나는 깊이라 부른다. 깊이는 내 안으로 들어가기이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 나는 그 무엇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내 안으로 들어가기이다. 내가 넓힌 그것은 나는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나, 내가 앎이라고 쌓아 놓은 것을 제대로 남에게 보여줄 수 있나, 알아듣게 설명할 수 있나, 이런 질문들로 물어서 표현할 준비를 갖추기이다. 이렇게 표현할 수 없다면 그건 알아도 아는 게 아니다. 아는 척할 수는 있어도 아직 쓸모없는 그것에 불과하다.

 

그것, 그것은 딱히 뭐라 말할 수 없을 때 흔히 말하는 거시기에 불과하다. 거시기는 진정한 앎이 아니다. 명확하게 보여줄 수 없을 때 거시기라고 하지 않는가? 그것을 이제 명사로 바꿀 수 있어야 깊이는 완성된다. 그것과 깊이, 그것은 내가 경험하거나 안 적은 있으나 형용하지 못하는 상태의 거시기라면, 명사는 그것의 이미지로 내 안에 안착한 상태의 앎의 모양이다.

 

어떻게 넓이와 깊이를 통과한 그것을 명사로 만들까? 우선 안다고 하는 것은 문장으로 만들어 표현한다. 이를테면 그 무엇은 ---한 무엇이다, 라고 정의한다. ---한 무엇은 --한 무엇과 같다, 또는 무엇과 유사하다, 그 무엇은 너와 나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무엇과 유사한 --한 면이 있고, ---한 의미에서 같은 맥락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그림을 그리듯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앎의 완성이다. 그러므로 앎이란 내 머릿속의 이미지를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는 또는 볼 수 있거나 이해할 수 있는 이미지로 바꾸어 설명 가능한 것을 말한다. 곧 앎은 내 안에 이미지를 다른 사람의 머리에 옮겨 심을 수 있는 온전한 이미지로, 넓이와 깊이는 이 지점에서 만난다. 넓이와 깊이는 지식을 설명하는 것이며, 지혜로 연결하는 초석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을 향한 관심은 내게 넓이를 주고, 그것은 내 안으로 들이면 나는 깊이를 얻는다. 넓이는 세상으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면. 깊이는 진정한 나를 찾아 내 안으로 들어오는 여행이다. 그 여행의 이러 저러한 모양이나 의미와 가치를 너에게 표현하는 것이 앎이다.

 

“너는 무엇을 아니? 그것을 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해 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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