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좌충우돌 세상읽기-68- 나는 나를 모른다

영광도서 0 441

사람의 심리는 아이러니하다. 두려움이 많은 자가 오히려 세상을 지배한다. 달리 말하면 두렵기 때문에 세상을 지배하려 한다. 용기 있는 자, 대범한 자는 세상을 지배할 이유가 없다. 두려움을 느낀 동물이 작은 몸집이라도 부풀리려 용을 쓰며 자기 몸집을 가능한 한 가장 크게 보이려 애쓰듯이 사람의 심리는 그와 비슷하다. 이처럼 심리와 행동은 정반대의 양상을 보이곤 한다.

 

대부분의 정치리더나 소위 뒷골목 조직의 리더는 비슷한 심리를 갖는다. 이들은 일단 다른 이들을 잘 믿지 못한다. 믿는 것은 오직 자신이거나 자기 확신이 선 몇몇뿐이다. 해서 인맥은 그 주변에 한정되어 확장성이 없다. 그 범주 안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끼리끼리 모일 수밖에 없다.

 

이를 좀 더 축소하면 겉으로는 이타애를 가진 성숙한 존재 같으나 실제로는 자기애에서 발전하지 못한 미숙한 심리에 빠져 있다. 때문에 자칫 자기관리를 잘 못하면 내로남불의 전형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한다. 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만 들여다보기 때문에 다른 세상을 볼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을 볼 수도 없다. 그래서 일단 내 편에 대해서는 신뢰를 보내지만 그것도 외부의 위기를 당했을 때뿐이고, 그 문제가 해결되면 다시 주변인도 믿지 못한다.

 

이런 자기애로 인해 피상적으로는 세상에서 리더로 지내지만 진실로는 자기애에 빠져 두려움을 안고 사는 존재는 점차 자신의 상황을 진정한 자신으로 받아들이는데, 이를 니체는 초인이라 부른다. 그런데 초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짚어보면 이들의 공통점은 첫째, 고독한 사람으로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담을 쌓는다. 둘째, 그 상황에서 상상이나 공상을 한다. 셋째, 그 결과를 진정한 자신의 모습으로 인식한다. 넷째, 그렇게 인식한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비춰본다. 다섯째, 자신을 지키기 위한 타인학대 또는 폭력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폭력의 발생은 자기보호를 위한 무의식에서 비롯된 세상을 두려워함의 표상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유형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크리니코프를 들 수 있다. 그는 사회에 부적응자로 피해의식에 갇혀 세상과 담을 쌓고 공상에 빠진다. 공상 끝에 그는 자신은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가 얻은 결론은 나폴레옹이나 시저는 수많은 사람을 죽였으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또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범죄자 취급을 받지 않고 영웅 대우를 받는다는 점을 파악한다. 그리고는 그 역시 시험을 한다. 전당포의 노파를 죽인다. 하필 옆에 있던 그녀의 여동생도 죽인다. 그리고는 몸에 기생하는 이에 불과한 벌레를 죽인 것으로 자기 합리화한다. 결국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타인을 해하되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 그는 나중에 죄의식을 가진 것, 그 때문에 소냐의 부탁대로 자수를 한 것을 후회한다. 물론 나중에 소냐의 사랑으로 제대로 된 인간으로 성장하면서 끝나긴 하지만, 감정을 갖지 않아야 한다고, 죄의식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그 시점까지는 초인연습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니체가 초인사상을 생각한 것은 라스크리니코프가 시작이었다고 한다.

 

이를 정리하면 이들의 공통점은 이들은 죄의식이 없다. 당연히 세상을 바꾸고 개혁하는 사람들은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이러한 소수의 초인의 몫이기 때문에 자신의 범죄는 당연히 범죄라는 인식을 하지 않아야 한다. 그들 스스로 그렇게 믿는다. 그 시작은 아주 오래 전에 헤브라이인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선민사상으로 이방인들은 잔인하게 죽여도 상관없었다. 중세에 십자군 전쟁에서도 수많은 이교도를 잔인하게 죽여도 그건 당연한 성전이었다.

 

‘세상은 다수의 민중이 바꾸거나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초인과 같은 소수가 이끌어간다.’라고 믿는 이들이 초인이 아닌가? 때문에 선민사상, 초인사상, 이기주의, 자기애는 자기합리화라는 공통점에서 맥을 같이 한다. 알고 보면 세상은 두려운 자가 자기를 지키기 위한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고, 그 세상에서 스스로 왕이 된 다음, 세상을 기웃거리면서 세상에 자기 왕국을 세우려는 생각이 작게는 자기애요, 크게는 초인이요, 자기 무리로 보면 선민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계속 이어진다.

 

때문에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벗고 세상을 경계하기보다 세상 밖으로 나와서 소통해야 한다. 세상은 적이 아니라 나의 동류이며 나를 돕는 자라는 확신을 가져야 하고, 그 안에서 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생활인이란 인식으로 같은 감정을 소유해야 한다. 나는 특별하다 나밖에는 없다는 자기 환상이나 착시가 세상과 나를 심리적으로 격리하게 만든다. 지금 고독한 나, 세상이 너무 몰라준다고 화를 내는 나, 지금 나는 누구인가? 세상이 두렵다면 자기애에 빠져 다른 사람을 바로 보지 못하고 편협한 자기애 속에 있음을 인식 못한다. 지금의 나를 극히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세상은 나를 내로남불이라고 한다. 진정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를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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