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좌충우돌 세상읽기-69- 그 잘난 이름이 뭐기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말은 살아 있는 존재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담고 있다. 소멸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다. 지금처럼 이 멀쩡한 정신, 생각하는 나가 더 이상 아무런 작용도 못하는 무기력한 상태로 떨어진다는 생각을 하면 두려움이 앞선다.
이 소멸의 두려움, 사라짐의 두려움은 무언가를 뒤에 남겨야 한다는 무의식으로 드러난다. 무의식은 나도 모르는 나이니 만큼 내가 나를 이해할 수 없게 무언가에 집착하는 나를 발견한다. 무엇을 남길까, 그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름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이름을 남기려 무진 애를 쓴다. 사람의 성향에 따라 물론 다르다. 이름을 남기고 싶은 사람은 성향에 따라 사회에서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직업이나 일을 선택한다. 따라서 어떤 직업군이냐에 따라 사람의 성향은 드러난다.
이름을 남기고 싶은 욕망이 강한 사람일수록 보다 이기적이며, 보다 위선적이며, 보다 독선적일 수밖에 없다. 이는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에 의해 사회는 변혁되기도 하고, 이들에 의해 새로운 무엇이 만들어지며, 새로운 작품이나 새로운 제도가 탄생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이름을 남길 유산이 뒤에 남아 그를 기억하게 한다. 이들을 우리는 역사에서 기억하고, 작품이나 예술에서 기억하고, 어떤 업적이나 제도에서 기억한다.
이름은 이처럼 사람에겐 중요한 의미가 있다. 사람을 제외한 모든 존재나 비존재는 이미 드러난 이미지나 결과물을 보고 인간이 지은 것이기 때문에 이들 모두는 이름값을 이미 하고 있다. 아니 이미 이름대로 존재한다. 반면 인간은 결과를 보고 이름을 짓는 것이 아니라 살아보기도 전에, 아무것도 모름에도 이름을 부여받는다. 그 이름대로 살라고, 이름값하고 살아서 이름을 남기고 죽으라고 지어준다.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이처럼 우선 자기 위로를, 더불어 자기 만족감을, 그리고 자기 성취감을 얻게 한다. 때문에 영원하고 싶은 무의식 때문에 때로 성향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자신의 이름에 목숨을 건다. 이름이 더럽혀짐에 따라 자기 목숨을 던질 만큼 이름에 애착을 갖는다. 전혀 나의 것이 아니었으나 살면 살수록 그 이름과 내가 하나로, 이름이 곧 나요, 내가 곧 이름이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정체성으로 살아간다. 내 이름이 더럽히면 내가 더럽고 내가 더럽히면 이름이 불명예를 쓴다.
이처럼 영원을 꿈꾸면 죽음이 점점 더 두렵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 저 세상에서 무화될 것 같은 두려움이라면, 그저 잠든 상태려니 두려워할 일이 아니지 않는가? 다른 두려움, 이 멀쩡한 정신으로 저 세상에 간다면 기다릴 심판에 대한 두려움, 그러면 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불멸의 두려움이다. 불멸도 두렵고 소멸도 두렵다. 그러면 우리의 두려움은 모순이다. 그러니까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두려움의 모순, 모순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사람은 이름을 남기려 한다. 어딘가에 기록되려하고 기억되기를 원한다. 좋은 이미지로. 때문에 이름이 더럽혀지면 그 이름의 더러움을 씻기 위해, 명예회복을 위해 무진 애를 쓴다. 불멸의 강한 욕구는 곧 소멸의 두려움의 강함을 나타내는 말이니, 이러한 욕심이 많을수록 이름에 무척 애착을 갖는다. 알고 보면 이름이란 처음부터 나의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이 나에게 붙여주었을 뿐인데, 나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남이 붙여준 이름에 고심하기보다 다른 자연물처럼 자연스럽게 내가 내 이름을 만들며 삶이 더 현명하지 않으랴.
어쩌면 우리는 이름을 담고 있는 몸보다는 이름을 더 기억한다. 이름은 곧 나를 나타내는 상징이자 상표와 같기 때문이다. 믿고 살 수 있는 상표가 따로 있듯이 나는 내 이름값하고 살고 있을까? 꼭 그 잘난 이름을 길이길이 남겨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