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좌충우돌 세상읽기-70- 밀란 쿤데라의 이마골로기와 글쓰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저자 밀란 쿤데라는 <불멸>에서 이미골로기(imagologie)를 말한다. 낯선 이 단어는 밀란 쿤데라가 조합해낸 신조어로 심상을 뜻하는 이미지image에 이념이나 관념의 표상인 이데올로기ideologie를 덧붙인 합성어이다.
이미지, 곧 심상은 마음에 그려지는 어떤 상을 말하여, 어떤 단어나 문장을 제지했을 때 그 문장이나 단어를 읽어낼 때 얻는 상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나의 어머니’란 단어를 제시라면 각자는 자신의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린다. ‘눈물 흘리는 어머니’하면 각자 자신의 어머니가 울던 모습을 떠올린다. 이 상은 강자가 자신의 경험 속의 그림이다. 이를 심상이라 한다. 단어는 같으나 각자 떠올리는 심상은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이를 글로 연결한다면 어떤 단어나 하나의 문장이 있다면, 이 문장이나 단어에 걸 맞는 자신의 경험을 채우면 곧 글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미지에 어떤 목적이나 관념이 들어 있는 것을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어떤 세계를 설명하고 변화시키는 것을 뒷받침하는 관념체계를 말한다. 이를테면 어떤 목적이나 의도가 들어 있는 구호와 같다. 이 말은 프랑스 혁명기에 철학자 A. L. C. 데스튀트 드 트라시가 자신의 '관념의 과학'의 약칭으로 도입하면서 처음 등장한다. 경험론자 베이컨의 ‘과학의 운명은 인간 지식의 확대뿐만 아니라 지구 위의 인간의 삶을 개선하는 일'이라는 말을 빌면 이데올로기는 보다 진보적인 목적을 담은 구호라 정의할 수 있겠다.
이를 광의적으로 보면 모든 종류의 행동지향적 이론이나 정치 관념의 모든 시도라 할 수 있다. 협의로 보면 데스튀트 드 트라시는, 우선 이데올로기는 인간경험과 외부세계에 관한 포괄적인 설명을 한다. 이어서 이는 일반적·추상적 용어로 사회·정치를 조직하는 프로그램을 제시한다. 다음 단계에선 이 프로그램의 실현을 위해 투쟁한다. 실현단계에선 때때로 서약을 요구하면서 충실한 지지자를 모은다. 마지막으로 광범한 대중을 향하며 지식인에게 특별한 지도역할을 부여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밝혔는데, 실제로 우리가 만나는 이데올로기는 이 과정을 그대로 따름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이데올로기는 이미지가 있을 것인데 그 안에 어떤 목적이나 의도가 들어 있는 의미나 관념이 들어 있는 것을 말한다. 즉 어떤 표어나 구호가 이에 해당한다. 예를 들면 요즘 많이 회자 되는 ‘기회는 평등하며,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다’라는 말은 바로 이마골로기라 할 수 있다. 기회는 평등할 것이란 문장에선 누구나 각자의 경험에서 생각하는 평등의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루소의 <인간 불평등 계약론>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테고, 과정은 공정하다는 말에서도 각자 생각하는 공정의 이미지,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다란 문장에서 역시 각자 생각하는 정의의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그러니까 구호는 있으나 구호에 따른 이미지는 각자가 떠올린 이미지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구호는 대중의 감정을 깨우고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 충분하다. 각자의 그림으로 대중을 설득해내며, 마음을 움직인다. 감동을 주기까지 한다.
다만 이 한계는 각자의 이미지는 있으나 공통된 이미지가 없기 때문에 원래의 취지인 추구하는 이데올로기가 변질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때문에 여기에 추진방향이라 할 목적이 추가된다. 추상적인 이미지에서 보다 구체적인 과정의 제시이니, ‘인간의 생명은 소중하다’는 하나의 구호에 그쳤다면, ‘배고픔으로 죽어가는 아프리카 아동을 살리기 위해’란 목적을 제시하고, ‘모금 운동을 합시다!’란 구체적인 활동을 추가한다. 그 다음엔 동조자를 모은다. 여기까지는 순전히 구호를 통한 동조자를 모으는 단계로 실천 방향제시라 할 수 있다.
밀란 쿤데라는 이 단계에서 현대는 한 발 더 나아간다고 한다. ‘-을 위하여’란 말에서 접 자신의 삶에 와 닿는 실천의 단계로 대중은 ‘을 위하여’란 자리에 대신 ‘-을 위한 권리’로 바꾼 이미지를 그려낸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의 ‘배고픔을 해결을 위하여’라면 ‘배고픔을 해결할 권리’로 변한다는 것이다.
구호는 있으나 목적이 없으면 그것은 무의미하다. 그저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어떤 진정한 실천의지가 있을 때 구호는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실천방향의 구체적인 그림이 덧붙여져야 진정성을 담보할 수 있다. 때문에 어떤 리더가 구호를 외치면 대중은 그에 맞는 그림, 거기에 이어질 구체적인 그림이 어떻게 가능할지를 먼저 그려야 한다. 구호는 항상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그 추상성에 진정한 실천의지가 담겼는지, 가능하긴 한지를 먼저 따지는 현명함이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는 멋진 구호를 진정으로 멋진 구호로 만들 수 있다. 구호보다는 실천의지이며 실천결과이다.
이러한 과정을 글쓰기와 연결시켜 보자. 구호는 주제문이라 치자. 주제문은 구체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주제를 듣는 순간 독자는 나름의 이미지를 얻어야 한다. 그렇다면 주제는 개인의 이미지가 들어 있되, 독자 각자 역시 나름의 이미지를 얻을 수 있는 보편적 문장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다음엔 그 주제문에 관한 실천방향과 실천의지에 해당할 구체적인 과정을 그리기이다. 이는 독자들이 보편적으로 이해할 만한 자신의 구체적인 경험도 좋고 그에 걸맞는 어떤 사례 사례로 보충하기이다. 이것이 글을 쓴 목정에 해당한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쿤데라의 말대로 목적에 부합하는 권리를 첨언하면 보다 완벽한 글의 모양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마골로기의 모습을 제대로 갖춘 것이 글이라 하겠다. 우선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롭다’와 같은 멋진 문장을 만들고, 평등하기 위한 과정을 구체적으로 채우고, 그에 따른 결과를 그린다면, 공정한 과정을 위한 구체적인 예를 충분히 제시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그려낸다면, 정의로운 예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그린다면 이 얼마나 멋진 나라일 것이랴. 그러나 글은 정치 구호가 아니기에 이 모든 것을 충족할 수 있는 모든 내용을 포함해야 한다. 구호와 글이 다른 점이 이것이다. 구호만 난무한 글, 주장만 잔뜩 들어간 글은 글이 아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글을 쓰려면 구호에 그에 어울리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채워야 한다.
나는 말한다. 그리고 그 말을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설명한다. 고로 나는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