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좌충우돌 세상읽기-72- 세상은 나를 보고
나옹선사의 시를 읽는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세월은 나를 보고 덧없다 하지않고
우주는 나를 보고 곳없다 하지않네
번뇌도 벗어놓고 욕심도 벗어놓고
강같이 구름같이 말없이 가라하네
구구절절 옳다. 청산은 제가 살아가는 것처럼 살라한다. 사랑도 말고, 미움도 말라고 한다. 성냄도 말고 탐욕도 말고 살란다. 번뇌도 말고 욕심도 말고 살란다. 대신 물처럼 흐르는 대로 넉넉하게 살란다.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란다. 구름처럼 살면 살고 죽으면 죽으란다. 이렇게 청산처럼 아니면 자연처럼 살 수 있다면 그게 인간이랴?
자연은 세상에 순응하며 산다. 자연은 본성 그 자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자연과 투쟁하며 살아왔고 살아간다. 물론 때로 자연과 화합하며 산다. 이를테면 인간이란 이름은 자유의지가 있어서이다. 자연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어떤 보이지 않는 섭리, 자연의 이치에 따라 존재한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유일한 존재이다.
자연이 아닌 동물도 어느 정도 자유의지가 있다지만 인간처럼 정교하지는 않다. 아무리 고등동물이라도 제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으나 인간은 자신의 소멸도 스스로 선택하는 존재다. 어떤 일에서든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세상을 쉽지 않게 살지 않는다. 물론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보다 편하고 싶어 한다. 보다 행복하고 싶어 한다. 이처럼 어제보다 나은, 남보다 나은, 다른 존재보다 나은 삶을 추구한다. 그것을 위해 애쓰면서 시간을 낚는다. 그렇게 보다 나은 무엇을 위한 애씀이 자연이 하지 말라는 사랑을, 미움을, 번뇌를, 성냄을 낳는다. 인간은 이런 아이러니를 만들며 사는 존재다.
비록 청산은 이렇게 살지 말라지만 인간은 이렇게 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이 하는 대로 따르고, 공간이 주는 대로 산다면 얼마나 좋으랴만 그건 삶이 아니라 죽음이니 어쩌랴. 본래대로 존재하는 것이 이상이라니 아이러니하다.
그런데 현실은 이와는 반대로 살라한다. 사랑도, 미움도, 성냄도, 욕심도 필요하다. 이것들이 없다면 인간이 아니니, 인간으로 살려면 사랑하고 미워하고 성내고 욕심내면서 살아야 하고, 그러다 보니 당연히 번뇌가 따를 수밖에.
그럼에도 희망고문 덕에 사람은 산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올 거라는 희망, 고달픔을 투자하면 편안함이 찾아오리라는 희망, 사람은 누구나 희망을 먹으며 산다. 그러다 더는 더 이상은 지금의 이 고달픔이 끝나지 않으리란 절망, 보다 나은 삶은 더 이상 없다는 절망, 오히려 지금보다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질 거란 절망을 만나면, 강한 절망이 가느다란 희망을 먹어버리면 더는 살 수 없다. 오늘도 누군가는 희망을 잃고 절망한다.
나는 나일뿐이다. 이상과 현실, 자연처럼 살고 싶으나 자연처럼 살 수 없는 인간인 나,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인간으로 살련다. 비록 고뇌와 번뇌가 따르더라도 보다 나은 나를 위해,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위해 나는 오늘을 살련다. 이 모두를 싣고 제멋대로 달려가는 시간의 수레바퀴가 언제까지 나를 데려갈지 몰라도, 쉼을 주지 않을지라도 사랑하고 미워하며, 성내고 욕심내며 그렇게 살련다. 그렇지 않으면 삶을 이어갈 수 없으니까.
청산은 나를 보고 물처럼 바람처럼 순응하며 살라지만, 세상은 나를 보고 물을 거스르며 바람을 역행하며 시간에 반항하며 그렇게 살라 하네. 미워도 하고 사랑도 하고 욕심내어 일도 하고 고민도 하고 번뇌도 하며 반항하며 버티며 그렇게 살라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