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좌충우돌 세상읽기-75- 말보다 아름다운 실천

영광도서 0 437

평등, 두 음절밖에 안 되는 단어지만 뜻으로 들어가면 아주 다양하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이 말은 설명하기조차 점점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단순화시켜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 무엇의 기회의 평등을 말할 수밖에 없다. 어떤 것의 기회의 평등이다. 어떤 권력에 들어감의 기회의 평등, 그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기회의 평등, 이렇게 저렇게 따져도 결국 평등은 기회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때문에 요즘 화두가 기회는 평등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기회의 평등이 가능하긴 한가? 말은 좋으나 요원하다. 평등이라는 말에는 누구만이 아니라 누구나란 등식이어야 성립한다. 여기에 어떤 것에가 아니라 무엇에나란 조건에 대하여이다. 그러니 기회의 평등이란 무엇에 누구나란 조건이어야 한다는 의미인데, 그것이 가능할 수가 없다. 굳이 가능하다면 원시부족사회로 돌아간다면 가능할 수 있다.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이 누구나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함께 누렸던 시대, 그때엔 평등이란 개념자체가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평등이란 단어가 등장했다는 의미는 이미 평등하기 어렵다는 전제가 있다는 의미이다. 세상엔 필요하지 않은 말은 나오지 않는다. 무언가의 필요에 따라 새로운 말들, 즐 신조어가 탄생한다. 그럼으로써 의미를 얻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치자. 아무도 나를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다 나의 쓸모를 느낄 때 사람들은 나를 기억한다. 나의 존재의미를 발견한 때문이다. 평등이란 말의 탄생 역시 평등이 깨지면서 등장한 단어라 할 수 있다. 이미 우리 인간은 평등하게 살 수 없으니 평등이란 단어를 필요로 한 것이다. 그러니까 말은 좋으나 가능하지 않다, 말은 쉬우나 이루기 어려운 게 평등이다.

 

때문에 이제 평등을 말하되 아무런 것에 평등이 아니라 그 무엇에의 평등이란 구체적인 범위를 함께 말해야 한다. 결과의 평등을 이루지는 못하나 기회의 평등을 가능하게 하겠다는 의미이다. 설령 그렇게 아무나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졌다고 해도 아무나를 평가하는 과정에서 똑같은 잣대로 재지 않는다면 그 기회의 평등이란 사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건 오히려 더 분노하게 하고 절망하게 만든다. 때문에 과정의 공정을 말한다. 과정이 공정하지 않다면 기회의 평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오히려 분노만 유발하기 때문이다. 이 말 역시 참 좋은 말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말의 탄생과정을 보았듯이 역시 괴정이 공정하지 않은 선례가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과정의 공정이 화두에 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공정이 이루어진다면 두말할 것 없이 정의로운 사회이다. 때문에 정의를 말한다. 이렇게 문제화되어 탄생한 동일선상에 있는 평등, 공정, 정의사회을 실현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국가의 탄생 이후, 두고두고 정의를 말하고 외쳐왔지만 한번도 이런 사회가 이루어진 적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런 좋은 말들을 화두에 올리고, 그것을 꿈꾸는 이유는, 이를 외치는 이유는 더 이상은 악화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계급이 없는 사회, 있다고 한들 특별한 권력을 부여받지 않고 동네 어르신 정도로 인정하는 분 서너 분만 있고 나머지는 위아래가 없는 자급자족 사회로 돌아간다면 가능할 공유와 공존의 사회, 그런 정도라면 기회의 평등은 아예 말하지도 않을 테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실현 가능하지 않은 화두 또는 구호로 서로 갈등중이다.

 

예를 들어 어느 지점에 보물을 감추었다고 치자. 그리고 누구나 기 보물을 찾을 기회를 준다고 치자. 그 보물을 찾을 기회가 평등하려면 출발점은 같아야 한다. 그런데 출발점은 계급에 따라, 계급은 아니라면 부의 정도에 따라, 권력에 따라, 인맥에 따라 출발선이 각기 다르다면 이는 이미 불평등하다. 요즘처럼 사회가 분화될 대로 분화된 사회에선 그 출발선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기회를 똑같이 준다고 하더라도 이미 평등하지 않다. 출발부터 평등하지 않으니 공정을 말해 무엇하랴. 이러한 과정을 두고 정의를 말해 무엇하랴. 그러니 이제는 완전한 평등이니, 공정이니, 정의니 이런 말을 떠나서 사회가 함의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전제에서 평등을 받아들이고 공정을 이해하고 이 정도쯤의 정의를 말하는 게 합리적이다.

 

이런 말들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면 어떤 구호에 호도되기보다 이런 것을 생각하고 애쓰는구나, 하는 진정성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족하고,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지 않기이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노력한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말은 아름다우나 실천의지가 없다면, 구호는 아름다우나 뒷받침이 없다면, 이상은 아름다우나 현실적이 아니라면, 한때 기분은 좋으나 실망은 크다. 그러니 그 무엇보다 실천이 담보되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다. 말로만이 아니라면, 진정 그렇게 노력한다면, 솔선수범한다면, 말에 책임을 지려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일 아닌가. 말이나 구호보다는 실천의지,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말보다 실천의지를, 추상보다 구체를, 이상보다는 현실을 먼저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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