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좌충우돌 세상읽기-83- 휴머니즘과 자유의지
휴머니즘은 인본주의라는 말에는 동양이든 서양이든 이의를 달지 않는다. 휴머니즘이란 단어의 탄생을 두고 고대 그리스다 아니면 르네상스 시대의 휴머니스트들의 정신을 말한다고 보는 게 서양식 휴머니즘이라면, 동양은 춘추전국시대의 유가, 도가, 법가, 묵가 사상을 기원으로 본다면 그 탄생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는 사람이 살아가는 무늬다, 누군가는 인간중심이다, 사랑을 나름대로 정의하는 만큼은 아니라도 다양하게 정의한다. 이러니저러니 휴머니즘은 인본주의라는 말은 서로 인정한다.
그럼에도 확실하게 휴머니즘이 이것이다라고 쏙 들어오지는 않는다. 그럼 신본주의에 염증을 느낀 르네상스로 돌아가서 신본에 반하는 인본주의라고 하면 확실할까? 그렇지도 않다. 완전히 신을 인간의 세계에서 내보낸, 인간만의 세계로 본다면 간단하겠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인본주의란 신을 완전히 떠난 인간중심이 아니라 신을 다시 해석하여, 아니 진정한 신의 자리에 신을 위치하게 하고, 인간이 신이 양보할 법한 것을 인간의 몫으로 확보한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이런 정도에서 휴머니즘을 말한다면, 동서양 모두 이 정도는 인정한다고 한다면 결국 휴머니즘의 정의는 “휴머니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심으로 한다.”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유의지, 여기엔 신이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신의 존재여부도 선택이다. 물론 인간이 선택 불가능한 것이 있다. 칸트가 말한 탄생과 죽음은 인간의 몫은 아니지만 인간은 삶의 탄생-선택-죽음의 궤적에서 인간의 몫은 가장 긴 선택이다. 휴머니즘은 이 선택을 중요하게 여긴다.
모든 것이 신의 섭리로 봤던 중세의 늪에서 벗어나, 인간은 자신의 운명마저 선택한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가 어떠하든 그 책임 또한 인간 각자의 몫이다. 이러한 선택과 책임이 휴머니즘의 요체이다. 인간은 선택한다. 행복을 선택한다, 불행을 선택한다, 편안함을 선택한다, 고통을 선택한다, 이 모두 인간의 몫이다. 이를 자유의지라 한다. 그렇다. 휴머니즘은 자유의지로 자신의 삶의 모두를 선택함을 이른다.
예를 들면 올더스 헉슬리가 쓴 <멋진 신세계>에서 휴머니즘 적 인간 존은 문명화된 편리함과 안락을 얻으라는 총통의 말에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라고 항변한다. 그것은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며, 그것은 “나이를 먹어 추해지는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지는 권리, 이가 들끓을 권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끊임없이 불안에 떨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요구하겠지?”라는 물음에 존은 침묵하다가 생각을 정리하고 “저는 그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라고 대답한다.
존이야 말로 휴머니스트라 할 수 있다. 내가 내 삶의 모두를 선택한다. 이처럼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의 삶이 휴머니즘이라 하겠다. 휴머니즘은 좋은 것이고 신본주의는 나쁜 것이다의 문제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이냐의 문제에서 어디까지를 신의 영역으로 두어 신의 섭리나 신의 은총으로 볼 것인지도 스스로 선택하는 것, 내가 내 삶을 선택하고, 그 선택한 결과를 신의 뜻으로 돌리기보다 나의 몫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자유의지, 곧 스스로 선택하는 삶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휴머니즘의 요체는 인간이 자신의 삶의 잡다한 문제들이든 중요한 문제들이든 스스로 선택하는 자유의지를 갖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선택한다. 오늘의 일들 하나하나를 내 의지로 선택한다. 그 결과가 나에게 행복을 줄지 불행을 줄지 그건 모른다. 하지만 그 모두는 내 선택의 결과이므로 나의 책임이다. 그렇게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내 삶을 주도적으로,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간다. 나는 나의 자유의지를 소중하게 여긴다. 나의 자유의지를 사랑한다. 고로 나는 휴머니스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