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좌충우돌 세상읽기-84- ‘그런데’와 창의적으로 생각하기
“그런데 저 사람은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까?”
이 물음은 두 가지 생각을 낳는다. 우선 하나는 자신의 생각에 갇혀 있다는 뜻으로, 전혀 창의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선입견에 빠진다. 이를 스스로 경계하지 않으면 그 안에 갇힐 수밖에 없다. 어떤 하나의 생각을 자기일반화로 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떤 정보가 내 안에 들어온다, 난 그걸 믿는다, 그 다음엔 다른 걸 볼 생각을 한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대상에 대한 굳은 이미지로 자리한다. 때문에 그는 더 이상 다른 것은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극히 상식적임에도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경우에 저 사람은 어떻게 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하지만 그는 지극히 당연하다. 이처럼 생각은 두렵다. 내가 나를 모른다.
다른 하나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해냄에 대한 경탄이다.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것을 그가 본다. 그에겐 ‘그런데’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제쳐두고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일까, 그런 자신을 향한 질문 덕분에 새롭게 볼 수 있는 경우이다. 그는 자신을 모른다는 전제에서 새로운 질문을 던진 덕분이다.
이처럼 대상은 같으나 누가 보느냐에 따라 대상은 더는 하나가 아닌 여럿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편견을 가지면 그것은 똑같은 대상으로 일상성을 갖는다. 더는 그것을 자세히 볼 이유도 없고, 다시 볼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이렇게 확고한 믿음이 들어서면 다른 생각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때문에 보다 창의적인 생각을 하려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일단 의심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인지 부분인지,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 편견인지 보편인지, 스스로 의문을 가지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생각을 얻을 수 있다.
창의적인 생각을 방해하는 것은 이미 들어와 있는 정보일 경우가 많다. 그 정보가 전부이다, 옳다, 정당하다, 그런 생각을 하면 다른 걸 생각할 이유도 필요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누구나 세뇌당할 수도 있고 편견을 가질 수도 있다. 이처럼 세뇌 당함이나 편견이 빠지지 않으려면 내가 지금 옳다 확실하다 하더라도 일단 ‘그런데’라고 자신에게 스스로 의문을 갖고 질문해야 보다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다.
무엇을 알고 있든 그것을 ‘그런데’로 묻지 않으면 그 정보는 언젠가는 쓸모없는 정보로 보편적인 정보밖에 되지 않는다. 보편화된 정보는 지식은 될 수 있어도 창의적이지는 않다. 그 지식이 확고하게 자리잡으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상관없이 편견을 만들거나 고인 정보를 만들 뿐이다. 이를테면 더는 새로운 것을 보려 않는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는 것만 보고 듣는 것만 듣는다. 그리고 그렇게 보고 들은 것만 믿는다. 이를 편견이라 한다.
따라서 이런 나의 상태에서 벗어난 새로운 생각, 보다 다른 생각을 하려면 지금 알고 있는 정보인 어떤 무엇이 있다, 또는 어떤 무엇은 무엇하다한 전제 다음에 ‘그런데’로 시작하는 질문을 던져야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다. 이제껏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다. 창의적인 것은 아주 새로운 그 무엇이 아니라 기존에 가진 생각을 깨거나 나눔에 있다. 그렇게 나누면, 또는 깨면 이제까지 못 본 것이 보이고, 이제까지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이를 창의적이라 한다. 창의적인 것은 내게서 멀지 않다. 이미 내 안에 무수히 많다. 내안에 고인 정보들을 재해석하기, 나누어 생각하기, 다시 생각하기, 이미 이 방식들에 있다. 나는 ‘그런데’라고 묻는다. 고로 나는 창의적인 생각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