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좌충우돌 세상읽기-85- 광의의 교육의 의미
교육이란 단순하게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상태를 인위적으로 바꾼다는 의미로 본다면 본성에 반한다. 그렇다면 이는 인간의 본성은 삶에 장애가 되거나 적어도 이롭지는 않다는 의미다. 또한 인간은 교육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자연그대로는 살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중국 당나라의 시인 백낙천은. "밭이 있어도 갈지 않으면 창고가 비게 되고, 책이 있어도 가르치지 않으면 자손은 우매해진다. 창고가 비면 세월을 지내기가 구차하게 되고, 자손이 우매하면 예의에 소홀하게 된다. 오직 갈고 가르치지 않음은 이는 곧 부모의 허물이다. "라고 교육 필요를 강조한다.
이처럼 인간에겐 교육이 필요하다면, 언제 어디서 어떤 교육을 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된다. 적어도 아무 때나 교육이 필요하냐 아니면 특정한 때에 교육이 필요하냐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언제 교육이 필요한가의 문제가 우선일 것이다. 이 문제를 논한다면 당연히 때에 맞는 교육을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우선 우리는 쉽게 유아교육, 아동교육, 청소년 교육 등, 한 사람의 성장과정에 따른 교육을 떠올릴 수 있다. 이는 가장 기본교육이라 할 수 있다.
아이는 어렸을 때는 단순한 교육정도면 충분하다. 그런데 자라면서 이 교육은 부챗살처럼 다양한 줄기줄기 뻗는다. 그만큼 교육의 종류가 다변화한다. 언제에서 어디로, 언제에서 왜로, 언제 어디서 왜로,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왜로, 교육은 다변화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언제는 때에 따라인데,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때보다 장소가 중요하다면 이젠 장소에 따라 필요한 교육이 세분화된다는 뜻이다. 게다가 왜라는 목적이 또한 교육의 필요를 요구하기 때문에 교육의 종류는 한없이 늘어난다.
때문에 교육이 있는 곳은 점차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쯤이면 왜 교육이 필요한가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차피 행복을 추구하는 동물인데 교육을 시작하니 점차 복잡해지고 골치 아프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교육이 없는 상태로 돌아가서 자연그대로 살자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미 인간은 차원 높은 교육이 이미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본성처럼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자연교육,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조차 교육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인간이 존재하는 한 언제나 교육은 필수이다.
homo education의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이처럼 교육은 인간이 존재하는 곳이면 언제고 어디서나 이루어진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기까지 어떤 형태로든 교육을 받으며 살아간다. 때에 따른 교육, 장소에 따른 교육, 여기에 목적에 따른 교육, 이 모두를 합쳐 넓은 의미의 교육으로, 학교교육, 직장교육, 가정교육뿐만 아니라 매스컴을 통한 교육 등, 이 모두를 아우르는 교육으로, 우리가 사는 곳 어디서나 행해지는 것이 교육이다.
광의의 교육, 인위적으로 삶을 조정하고 바꾸는 교육, 인간을 본성대로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을 바꾸게 하는 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은 홀로만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존재, 곡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살기 위해,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에 적응해 살기 위해 광의의 교육 속에 들어 있다. 교육이 많이 필요한 사회는 피로한 사회이다. 어쩌면 피로한 사회는 곧 사회의 일부 책임이기도 하니, 사회의 리더들, 정치인들, 그들이 일부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살아남기를 최적화하도록 노력하는 것, 리더들의 몫이 아닐까?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는 잠재적으로 교육을 받는다. 누가 교육하든 그렇지 않든 생존하기 위해 나는 사회에 적응해야 살아남는다. 곧 적자생존의 원리를 적용 당한다. 때에 맞게 살아남아야 하고, 장소에 따라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나 스스로를 교육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