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좌충우돌 세상읽기-92- <정체성>,너는 누구냐 물으면

영광도서 0 446

‘아무 때’ 나 던지는 질문은 아니고, 누군가 한심스럽다 느낄 때 ‘도대체 너는 어떤 놈이냐?’라고 묻는다. ‘도대체 너는?’ 이 말은 곧 정체성을 묻는 것이다. 다른 말로 상대가 나를 모르겠다는 뜻이니, 피상적으로 알 수 있는 ‘나’를 묻는 게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언행을 모르니 속안에 무엇을 품고 있느냐를 묻는 말이다. 남이 봐서는 알 수 없는 ‘나’, 나는 알고 있는 나, 진실이라고 믿는 있는 나, 고로 내가 규정한 나를 심리학에서 ego, 즉 ‘자아’라 한다. 때문에 자아는 내가 아는 나, 내가 나라고 믿는 나, 내 안의 나를 이른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너는 너를 아느냐?’라는 물음이 뒤따른다. 내 안에 모르는 나, 이 ‘나’를 무의식이라 한다. 나도 모르는 내 안에, 내 심층 깊은 곳에 있는 나, 그래서 나 자아에게 나를 부추기거나 나를 금지시키는 나를 욕망적 자아인 이드 또는 도덕적 자아인 슈퍼에고라고 할 테니, 내가 알고 있는 나와 내가 모르고 있는 나를 동일시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라고 믿는 어떤 성질을 정체성이라 할 것이니, ‘너는 도대체 누구냐?’라고 물을 때 내가 나라고 믿고 나를 말하면 그것을 일단 정체성으로 규정한다. 그래 그렇게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을 진정한 정체성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밀란 쿤데라는 <정체성>에서 그걸 말하려 하는 것 같다. 내가 나를 규정하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 어쩌면 내가 모르는 나가 더 많은데 그건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내가 나라고 믿는다는 점이다.

 

여기서 그러면 ‘진정한 너의 정체성은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내가 아무리 잘 대답을 한들 바른 대답을 하기는 어렵다. 내가 모르는 나가 있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 심리학적으로 들어가 보자.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말하면서 무의식, 내가 알고 있는 부분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오히려 내가 모르는 부분인 무의식의 나를 도외시하고 내가 나를 말한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의식이다. 때문에 전정한 자기 정체성은 의식과 무의식까지 포함한 ‘나’를 말해야 한다.

 

좋다. 내가 모르지만 분명 나, 무의식의 나를 열거하면, 꿈에 나타나는 온갖 이미지들, 그것이 현실적이든 비현실적이든 내 안에 찾아오는 모두는 분명 남의 생각이나 남의 기억이 아니라 나의 기억이자 나의 생각이니 그것도 분명 나이다. 이처럼 꿈, 자유연상, 사색, 환상, 생각, 이러 저러한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이미지들은 곧 나 자신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는 누구냐’라는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고작 나의 대답은 내가 알고 있는 나를 말하고 있으니 극히 일부분에 해당하는 나를 정체성이라도 내놓는 것이다. 고로 나는 나의 진정한 정체성을 모른다, 이것이 밀란 쿤데라가 질문을 던지는 시작일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면 이제 결론을 위해 ‘어떻게 나는 나의 정체성을 알 수 있을까?’ 이 질문을 던진다. 그 대답은 나는 나를 모두 모르므로 그것을 대답할 수 있다. 결국 그 대답을 하려면 원초적인 나로 돌아가야 한다. 생텍쥐페리가 “완전이란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떼어낼 것이 없을 때 이루어진다.”고 말했듯이, 완전히 고유한 나를 찾으려면 애초에 나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진정한 나이고 그 이후 나는 덧붙여진 나, 포장된 나, 가면을 쓴 나, 곧 본유에서 벗어난 나로 가공의 정체성이라 할 만하다. 이러한 ‘나’를 굳이 자아로 규정한다면 분열적 자아라고 할 수 있다. 이 분열적 자아의 규정은 남이 나를 그렇다고 규정하는 나, 전술한 이러저러한 무의식의 나, 그러한 ‘나’들이다. 남에게 특별한 나를 보여주려 한다. 그건 진정한 나가 아니다. 보여주려는 나, 이미지로서의 나, 곧 남이 나를 이렇게 기억해주기 바라는 나일 뿐인데, 그것마저 나는 나라고 믿는다. 남의 눈에 비친 나를 말이다.

 

‘너는 무엇 하는 놈이냐’고 물으면 나의 정체성을 묻는 말이지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나를 말할 뿐이다. 나의 자아를 말이다. 그런데 그런 나는 내가 규정한 나, 내가 인식하는 나에 불과하다. 남들이 나를 이렇게 저렇게 부른다면 그걸 나로 인정한다 한들, 내 생각에, 내 사색에, 내 환상에 나타나는 그런 이미지들은 어디서 오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이렇게 저렇게 타인들이 규정한 나, 나 스스로 규정한 나, 이를 하나로 합하여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말해야 할 텐데 그걸 어찌 다 수집하랴. 하여 결국 나는 나를 모른다. 나는 나의 진정한 정체성을 모른다. 그러면 나, 진정한 나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진정한 나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이 질문이 남는다. 그건 내일 나를 창조한 신에게 여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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