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좌충우돌 세상읽기-93- 정체성, ‘나는 나예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영광도서 0 452

“너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냐?”

 

이 물음에 “나는 나야!”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세상에서 나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존재는 나라고 나는 인식한다. 그래서 나는 나를 다른 사람에게 쉽게, 아무렇지 않게, 당연한 듯 나를 설파한다. 하지만 나 자신에 관해 내가 모르는 것이 더 많다. 내가 인식하는 것은 고작 의식의 나, 곧 에고라는 자아뿐이다. 적어도 무의식의 나를 나는 모른다. 그런 무의식의 나는 나에게 나타나 ‘내가 너’라고 시위한다. 이를테면 꿈에 나타나는 다양한 이미지들, 불현듯 떠오르는 다양한 생각들, 이처럼 생각지도 않은 것들이 꿈에, 환상에, 생각에 수없는 이미지들로, 어떤 사건으로 떠오른다. 그런 온갖 영상들이건 이미지들이건 그 모두는 나의 기억들이다. 잊어서 알 수 없지만, 기억에 없지만 언젠가 누군가에게 들었을, 언젠가 읽었을 내용도 있고, 체험한 이야기도 있을 것이나 나는 기억 못할 뿐인 잡다한 것들, 그 모두가 내 기억 어딘가에 꼭꼭 숨어 있으니, 그것이 무의식의 ‘나’들이다.

 

그런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꿈을 가정해 보자. 꿈을 꿀 때는 진지하고 실감난다. 그러나 깨고 보면 도무지 논리가 맞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왜냐하면 잠들었을 때는 뇌의 기능 중 순차적으로 기억하도록, 순차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기능이 잠들어 간섭을 못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기억의 창고 속에 잠들었던 이미지들이 아무렇게나 두서없이 뇌 속에서 활동한다. 그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나타나는 무질서한 이미지들이 꿈이다. 그 꿈들도 나의 기억들이다. 이렇게 기억은 나의 이미지를 만들고 나에게 ‘이게 너야!’라고 외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부지불식간에 그 모습들이 드러난다. 그럴 땐 나는 나를 모르지만 남이 먼저 나를 안다. 이러한 무의식중에 드러나는 언행을 남들이 기억한다. 그것이 남들이 나를 바라보는 이미지로, 남들이 규정한 나의 정체성이다.

 

이쯤에서 나는 내가 규정한 이미지와 남들이 규정한 이미지가, 곧 내가 규정한 나의 정체성과 남이 규정한 정체성이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이게 나야’라고 말한들, 다른 사람은 나에게 ‘너는 도대체 어떤 놈이냐’라고 반문한다. 밀란 쿤데라는 <정체성>에서 이 점에 관심을 둔다. 너는 진정한 정체성을 모른다고 말한다. 그보다는 오히려 타인들이 나를 더 잘 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의 모두를 미리 보았고, 항상 지켜볼 수 있을 테니까.

 

책을 열면서 실종자에 관한 수다를 샹탈이 듣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다 생탈도 수다에 참예한다. 부르디외 가족의 실종사건을 다룬 텔레비전 프로에 관한 수다다. 이 수다를 촬영하는 과정을 예로 들면서 “우리 발걸음 하나하나가 통제되고 녹화되는 이 세계, 커다란 백화점에서는 카메라가 우리를 감시하고, 사람들끼리 쉴 새 없이 부딪치고, 심지어 섹스를 한 뒤에도 다음날 연구소 직원이나 설문조사원의 질문을 받는다.”면서 누군가 또는 기계가 지켜보는 세계 속에 드러나는 불쾌함을 말한다. 저 높은 곳에서, 전지전능한 신은 내 언행뿐 아니라 내 속까지 환히 들여다본다고 생각하면.

 

그렇다. 우리는 완전히 노출 당하고 있다. 내가 나를 모르는 순간에도 누군가의 기억에 생생하게 잡힌다. 이렇게 시작한 나에 대한 타인의 기억을 쿤데라는 샹탈의 일의 현장에서 다시 확인한다. 그들이 광고를 찍는 회의를 한다. 그들은 가진 정보로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소위 광고를 찍는다. 아기와 엄마가 키스를 한다. 다정한 시선으로 아기를 내려다보는 애정 어린 시선과 아기의 해맑은 시선이 만나는 키스 장면이다. 그런데 이 장면을 키스하는 부분만 확대하고 나머지 이미지는 편집한다. 이 편집의 결과 애초의 성스러운 키스의 이미지는 에로틱한 남녀의 성애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이처럼 편집한 결과물은 내가 아닌, 네가 아닌, 일반적인 이들에게 공개되는 이미지로 변한다. 그것 또한 나의 이미지 중의 하나, 곧 불특정 다수의 나를 볼 사람들이 갖게 될 나의 정체성이다. 그러니 나 하나를 두고 나의 이미지는 각각의 시선에 따라 수없이 다른 이미지들을 생성한다.

 

임산부의 자궁 속의 태아를 본다. 태아는 완벽하게 수음을 한다. 자신의 생식기를 자신의 입으로 빨고 있다. 온몸이 유연한 태아는 완벽한 자기 수음이 가능하다. 여기서 아이가 수음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는 않다. 아이는 전혀 모르는 자기 이미지를 오히려 우리가 지켜본다는 점이다. 샹탈은 그 영상을 보면서 충격에 빠진다. 태아조차도 자신은 전혀 모르고 있는, 나중에 기억도 못하는 자신의 이미지를 다른 사람들이 벌써 목격한다는 것, 그리고 기억할 것이라는 점에 충격을 받는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중에도, 심지어 태아 때부터 속속들이 감시당한다. 내가 모르는 것을 네가 먼저 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한 것을 수많은 너들이 나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들은 말한다. ‘이게 너야!’라고. 그렇다면 ‘나는 나야’라고 말한들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불쾌한 느낌이 확 올라온다.

 

이렇게 속속들이 드러나는 나의 이미지들, 나는 그걸 거부할 수 없다. 내가 모르는 나를 나는 인정해야 한다. 해서 샹탈은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관심을 갖는 중년의 여자로 변신한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자신을 슬퍼한다.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아.” 누군가 기억해주지 않는다, 관심에서 멀어진 자신이 서글프다. 노화의 정도는 남자의 시선의 관심과 무관심이 척도라고 쿤데라는 말한다. 관심에서 멀어진다는 건 실체가 없는 투명한 존재로의 추락을 의미한다.

 

샹탈, 그녀는 시선 받기를 원한다. 남편의 정다운 시선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의 음탕한 시선을 원한다. 아무런 관계없는 사람들의 시선, 때로는 이 시선은 불쾌하고 불편하다. 곳곳에서 감시당하는 게 기분 나쁘다. 그러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시선을 받지 못하면 서럽다. 타인의 시선을 불쾌하면서도 타인의 시선을 원하는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누군가의 기억에 남고 싶은 나는 기왕이면 멋진 기억을 남기고 싶다. 때문에 나는 진실한 나로 타인에게 다가가는 게 아니라 진실한 나를 가장하고 그들에게 다가간다. 그러면 그들은 그러한 나의 이미지들을 기억한다. 그런 기억들은 누군가 가지고 있다면 그는 나에게 말한다. “이게 너야!”라고. 이렇게 규정 받는 나, 내가 알고 있는 나, 도대체 진정한 나는 누구일까? 누군가 자신 있게 ‘이게 너야’라고 말할 수 있는 누군가 있을 것이다. 내가 나를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근거를 가지고 나를 설득할 존재는 누구일까? 그래 내일은 그걸 따져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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