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좌충우돌 세상읽기-109- 생각은 내 바람의 종자다

영광도서 0 555

다양한 식물들이 자라는 숲으로 간다. 어떤 이는 그 숲에서 나물을 뜯는다. 어떤 이는 약초를 캔다. 어떤 이는 만져본다. 어떤 이는 냄새를 맡아본다. 어떤 이는 그냥 구경한다. 같은 곳에서 같은 것을 보지만 그것을 대하는 양태는 다양하다. 여러 모습이 나오는 이유는 그들 각각 다른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그들의 언어를 낳으니 침묵도 언어다. 부동도 행동이니 생각이 그들의 행동을 낳는다. 이렇게 언행이 달라짐은 수없이 떠오른 생각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차이 때문이다. 이를테면 아무 쓸모없을 잡다한 생각의 덩어리로 취급받을 잡념으로도 어떤 이는 예술로 바꾸는가 하면, 어떤 이는 그야말로 쓸데없는 생각으로 치부하고 흘려버린다. 그러면 그러한 생각들은 잡념이란 이름으로 흘러가서 기억에서 완전히 소거되고 만다. 잡념과 구상의 차이는 거기에서 비롯된다.

 

창조신 브라흐마는 잡념을 창조로 바꾼 신이라고 할 수 있으니, 세상의 잡다한 모두는 생각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는 선악의 문제,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를 세상에 토해냈다는 것이 중요하다. 수없이 떠오르는 생각을 즉석에서 발현하면 잡다라 하겠고, 그것을 발현하지 않고 흘려버리면 망각이라 하겠고, 그것을 종자 삼아 무언가 하려고 되새기면 구상이라 하겠다. 때로는 잡념도 창조적인 발상으로 바뀔 수 있다는 의미이다.

 

생각은 생각을 낳는다. 잡념은 잡념을 낳고 구상은 구상을 낳는다. 그러니 잡념이 싫다면 잡념이 수없이 떠오르는 환경조성을 하지 않는 게 좋다. 잡념을 구상으로 바꾸는 방법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내버려두지 않으며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하려는 노력해야 가능하다. 예술가가 예술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늘 어떤 구상을 하려는 의식 덕분에 무엇을 보든 예술의 종자로 삼으려는 생각 때문에 그러한 생각을 낳기 때문이다. 잡념이 싫다면 원하는 종자를 생각하면 가능하다. 글을 쓰는 이들이 무엇을 보든 글로 바꾸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무엇을 보든 글의 종자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잡념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의도적인 생각은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지만 의도하지 않고 자신은 내버려두면 아주 잡다한, 아주 엉뚱한, 전혀 생각하지 못한 희한한 생각이 떠오를 수 있다. 때로는 이러한 멍한 생각이 아주 멋진 발상을 빚기도 한다. 그러니까 어떤 생각을 할 것인지는 각자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태초에 야훼가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창세기는 시작된다. 그렇게 야훼는 빛을 창조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6일 간에 천지창조를 끝낸다. 그리고 그것을 창조할 때마다 결과를 향해 “보기에 좋았다.”라고 기록한다. 그렇다면 야훼는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 아니라 생각을 품었다가 결과를 상상하면서 신중하게 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야훼는 오랜 그리고 치밀한 구상을 한 후 창조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을 품었다가 가려서 세상에 내어놓는 것을 구상이라 한다. 잡념과 구상의 차이라면 그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두뇌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생각을 알 수 없다. 각자가 세상 밖으로 내어 놓는 결과를 보고야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생각으로 세상을 사는지 알 뿐이다. 살아 있는 존재는 누구나 같은 시간이면 같은 양의 생각을 한다. 다만 그 생각을 구조화하며 자기 것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의식 밖으로 떠올리거나 한다. 기억하는 생각, 곧 잡념도 일어난 생각을 최소한 의식 위로 떠올린 생각이기 때문에 잡념이란 이름을 얻는다. 누구든 생각의 양은 같으나 흘려버리느냐 그것을 잡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무의식의 바다로 흘려보내는 수많은 생각의 흐름을 이제는 의식의 뭍으로 끌어올려 보다 생산적인 나로 만드는 방법은 생각의 습관을 만들기이다. 찰나 찰나라고는 해도 변하는 그 무엇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없다. 아주 작은 간극으로 사이가 있다. 수없이 겹치는 생각들 사이에도 간극은 있기 때문에 생각은 겹치지 않는다. 때문에 어떤 생각에 집중하면 생각은 순서를 따라 나오게 마련이다. 생각이 무의식으로 흐르도록 넋을 놓고 있지 않고 무엇인가에 집중하면 생각은 순서 또는 질서를 갖는다. 그런 생각 습관이 나를 창의적으로 만든다. 사색이나 명상 또는 구상이 그런 것들이다.

 

세상에 무념은 없다. 무념이란 어떤 생각에 초집중한 상태를 말할 뿐이다. 지극한 아름다움 앞에 할 말을 잃은 경험이 있다면, 예를 들어 아주 환상적인 눈꽃을 보고 입을 벌리고 멍하니 있을 때, 생각이 멎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면, 그것은 생각이 없어진 게 아니라 그 아름다움에 초집중한 까닭이다. 지극한 행복 역시 초집중이 빚어주는 선물이다, 무념에는 당연히 무상이 따르는데 어떤 상이 마음에 맺히지 않음이 아니라 기막힌 상이 눈앞에 있고 거기에 육안과 심안이 초집중하여 겹쳐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상과 마음의 눈이 완전일치의 느낌이 초극적인 행복, 곧 종교적으로 니르바나요, 성적으로 오르가슴이다.

 

이처럼 생각은 살아 있는 매순간 한다. 의도적이거나 어떤 새로운 대상이 눈에 걸리면 생각은 그제야 떠오른다. 생각을 보다 창의적으로 떠올리기는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태도에 달려 있다. 시를 쓰는 사람은 무엇을 보든 시의 종자로 떠올리고, 예술을 하는 사람은 예술의 종자로 떠올린다. 행복하고 싶은 사람은 무엇을 보든 행복의 종자로 떠올린다. 행복의 질은 내 관심, 내 목적이 결정한다.

 

“나는 글을 쓰고 싶다. 고로 나는 무엇이든 글의 종자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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